칠판에 글씨를 쓰면 분필의 모양이 바뀐다. 쓴다는 것은 조각을 하는 것과 같으며, 글을 쓰는 사람은 언어의 조각가이고, 설계사는 선의 조각가이다. 글로 된 문서와 이미지 파일이 모두 디스켓에 기록되는 것처럼 분필에도 존재한다.
칠판에 그린 선의 길이는 분필의 길이와 같다. 그건 분필의 자화상이고, 자화상은 분필의 복제물이다. 다만 아주 가늘고 평평할 뿐이다. 길이가 578미터인 선은 대단히 길고 평평한 분필과 똑같다.
칠판에 그려 안을 분필로 석찰한 큰 원은 아주 두껍고 짦은 분필이라고 할 수 있다. 분필의 모양은 쉽게 바꿀 수 있지만, 그래도 분필은 여전히 분필이다.
분필은 그 자체가 선이다. 다시 말해 잡아서 던질 수 있을 만큼 굶은 3차원적 선으로, 이는 실물과 똑같은 자화상이다. 사실 너무나 똑같아서 그림과 실물을 구분할 수 없다. 그림과 실물이 동일한 것은, 다른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나무는 목재로 그린 3차원 그림이고, 기중기는 철로 그린 3차원 그림아ㄷ.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중기는 기중기로 그린 기중기의 3차원 그림이다. 스카이라인은 빌딩으로 그린 선이고, 적도는 분필로 그린 가는 선이다. 이 분필은 가루가 날리지 않는다. 이 분필로는 무한히 긴 선을 그릴 수 있다.
p. 44 ‘위대한 몽상가’ / 테오 얀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