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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서는 중년의 남성이 어린 소녀를 탐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읽기 시작하면서 과연 이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관해 고민했다. 과연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읽고 나선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우려와는 달리 책은 상당히 재밌게 쓰여있다.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 아는것도 박식할 뿐더러 키크고 멋진 외모와 좋은 목소리를 타고난 이른바 잘난놈이면서도 내면에는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사랑의 기준을 가진 탓에 그의 내면은 상당히 시니컬하고 세상 모든 것을 비틀어 보며 서술하는데 그런 관점이 불쾌하지 않고 재치있게 다가온다. 이제껏 읽었던 이른바 유명한 책들과 비교하자면 그 명성에 비해 상당히 재밌고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번역의 역할도 있었을게다.

1부에서는 그가 꿈에도 그리던 이상형 – 14살의 롤리타 – 을 만나 사랑을 키워나가 마침내 단둘이 있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2부는 그 관계가 파국에 치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1부에서 주인공 험버트의 어깨 너머로 세상을 보며 이건 사랑이 아니야 라고 말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지만 파국이나 막장에 이르는 많은 관계들 상처, 아픔들. 수많은 축복속에서 맺어졌지만 몇주만에 남남이 되는 수많은 관계를을 미루어 보면, 분명 이 둘의 관계를, 법적으로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나 달콤하고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2부에 이르러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사춘기를 관통하는 들쭉날쭉한 롤리타의 변덕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양아버지이자 보호자의 권력으로 관심을 막는 주인공 때문이기도 하고, 뭐 따지고 보면 사랑이란게 좋다가 나쁘기도 한 거니까. 후반에는 애닳토록 사랑을 했지만 그런 사랑을 헌짚신처럼 걷어찬 롤리타에 대한 증오가 주를 이루며 종결로 달려간다.

결혼한 롤리타를 험버트가 찾아가 물어보는 장면이 있다. 그때 자신을 사랑하긴 했었냐고. 그때의 롤리타의 놀란 얼굴로 말이 없다. 질문은 다시 반복된다. 과연 이게 사랑인가. 롤리타에게 역시도 달콤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사랑이었지만 선택할 권리를 주지 않았던 사랑은 착취로 변해버렸구나.

이 책에서 주인공 험버트는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끊임없이 변론하고, 책 어디에서도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고 나오진 않는다. 그것이 이 책을 감히 명작이라고 부르게 되는 지점이 아닐까. 마지막에 이르러 무릎을 치며 감탄하게 되었다.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말한다. 사랑이란 추울때 내 옷을 벗어 옆사랑에게 벗어주는 행위라고, 내가 아닌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라고. 지금도 수 많은 연인들이 사랑을 하고 있다. 과연, 나를 위한 사랑을 하고 있는건 아닌지 이 책 ‘롤리타’는 묻는다.

몇개의 단편들이 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대체로 불행하고 문제가 있다. 부부사이, 혹은 음주, 사랑, 죽음까지. 등장할 때부터 문제를 이미 가지고 있거나 아니라면 곧 맞닥뜨린다.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인생은 그런 법이려니 하는 듯한 어조로 담담하게, 독자의 머리속으로 인물의 어두운 표정들이 드리워진다.

단편의 특성상 이야기가 금방 끊기고, 다시 몰입하기 쉽지 않다. 간신히 몰입을 해서 읽다보면 금방 페이지의 끝이 보인다.

그의 마법은 그곳에서 시작된다. 아무런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부유하는 듯한 느린 체연함 속에서, 어떤 한 눈 깜짝할만한 찰라에 뭐라 설명하기 힘든 그 무언가가 번득인다. 아주 잠깐, 속박과 시련의 굴레에서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놀라운 한순간이 그림자를 비춘다. 구원, 아니면 은총일까. 누구에게나 주어진 작은 선물일까. 눈치채지 못하게 찌뿌린 얼굴로 소설을 읽어 내려간 독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순간을 차곡차곡 숨겨놓았다.

"이 냄새를 맡아보시오" 검은 빵 덩어리를 잘라내면서 빵집 주인이 말했다. "뜯어먹긴 힘든 빵이지만, 맛은 풍부하다오." 빵 냄새를 맡은 그들에게 그가 맛을 보게 했다. 당밀과 거칠게 빻은 곡식 맛이 났다. 그들은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더이상 먹지 못할 정도로 먹었다. 그들은 검은 빵을 삼켰다. 그건 형광등 불빛 아래로 들어오는 햇살 같았다. 그들은 새벽이 될 때까지, 창으로 희미한 햇살이 높게 비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Smell this," the baker said, breaking open a dark loaf. "It’s a heavy bread, but rich." They smelled it, then he had them taste it. It had the taste of molasses and coarse grains. They listened to him. They ate what they could. They swallowed the dark bread. It was like daylight under the fluorescent trays of light. They talked on into the early morning, the high, pale cast of light in the windows, and they did not think of leaving.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A Small, Good Thing" p.142

…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앞으로는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각자 상대방 없이 할 수 밖에 없다는 그 사실이 그 순간 그 무엇보다도 슬픈 일처럼 그에게 느껴졌다.
… 웹스터 부인은 칼라일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바로 그때, 그가 창가에 서 있을 때, 그는 뭔가가 완전히 떠나갔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일린과 관계된, 이전의 삶과 관계된 그 뭔가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 적이 있었던가? 물론 그랬을 것이다. 그랬다는 것을 안다. 비록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하지만 그는 이제 모든게 끝났다는 걸 이해했고 그녀를 보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이 함께한 인생이 자신이 말한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인생은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지나침은 – 비론 그게 불가능하게 보였고 그가 맞서 싸우기까지 했지만 – 이제 그의 일부가 됐다. 그가 거쳐온 지난 인생의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열 "Fever" p.283

…"멈추지 마. 그려." 말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에 딱 붙어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다 그린 것 같아." 그는 말했다. "한번 보게나. 어떤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계속 그렇게 있어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 그가 말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Keep them that way,” he said. He said, “Don’t stop now. Draw.” So we kept on with it. His fingers rode my fingers as my hand went over the paper. It was like nothing else in my life up to now.
Then he said, “I think that’s it. I think you got it,” he said. “Take a look. What do you think?”
But I had my eyes closed. I thought I’d keep them that way for a little longer. I thought it was something I ought to do.
“Well?” he said. “Are you looking?”
My ey es were still closed. I was in my house. I knew that. But I didn’t feel like I was inside anything.
“It’s really something,” I said.
대성당 "The Cathedral"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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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악마가 될 때가 있다. 우리는.

내뱉은 말이 소리가 되어 나오는 순간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너무 늦게 깨닫는 순간이 있다. 부정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때로는 자신만의 작은 부끄러움으로, 때로는 평생의 후회가 되기도 한다.
어린아이의 순간의 선택으로인해 파멸해 버린 한 연인의 이야기가 있다. 내 손에 제우스의 번개가 들려 있음을 알게되면 그 짧은 순간 자신의 힘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 소녀는 그런 순진한 열정과 자만으로 자신의 생각을 현실에 덧씌우는 선택을 한다.

…도로와 신문 덕분에 세상에 비밀이란 남아 있지 않게 된 이 나라에서 그런 잔혹 행위가 비밀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몰란드 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던 겁니까?
– 제인 오스틴 ‘노생거 수도원’중에서

나는 한가지 확신한다. 틀린 판단을 내리는 순간 그는 이미 알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동을 만드는 내적 동기가 있었다고. 그렇기 때문에 그로 인한 책임은 온전한 그의 것이 된다. 우리 삶은 말 한마디에도 부서질 정도로 너무나 연약하고, 그 부서져버런 것은 다시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용서란 글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처음으로 책을 읽으며 깊은 분노를 느끼며, 울고 웃게 만든 책.
속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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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린 것은 5주 전인데 이러저러해서 읽지 못한채로 반납하고 독서모임일을 하루 남겨놓고 하루만에 다 읽었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스터디그룹의 승준님이 보여주셨을땐 매우 유익할것으로 보여 읽어보고 싶었지만, 역시 건전한 책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드디어 완독을 하고 나니 생각보다 너무나 재밌고, 내용도 훌륭했으며 나도 모르게 내 고민을 해결해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답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문제를 말이다.

이 책

이 책은 일단 잘썼다. 일본인은 책을 잘 쓰는 것일까. 편집자가 좋은 사람인걸까. 글에서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가끔은 가볍운 농담을 던지기도 하지만 전 원래 진지한 사람입니다 하는 듯한 자세 말이다. 베어있다는 표현처럼, 분위기가 글에서 뚝 뚝 묻어나온다. 또한 자본론과 빵집 운영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너무 잘 조화를 이룬다. 저번에 독서모임에서 읽었던 ‘철학자와 늑대’도 늑대 이야기와 철학 이야기를 이와 같은 형식으로 잘 버무리려고 했었는데, 왠지 후반부로 지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 책은 그런 균형을 너무 잘 잡았다. 글의 구성도 마치 영화처럼 시공을 오가며 긴장시켰다가 웃음을 자아냈다가 감동을 잔잔히 전하곤 한다. 번역의 힘인가, 편집의 힘인가. 여하간 흐름이 너무 좋았다.

문체

군더더기가 없다. 일본문학의 특징일까. 아니 모든 잘 쓴 글은 뺄 수 없을 때까지 빼고 또 빼야 한다. 빼는 것을 참 잘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신한 표현들.

부패와 발효라는 단어가 아주 많이 나온다. 빵을 만드는 과정에서 물론 나오지만 이를 경제와 연관시켜 보는 시각이 재밌다. 모든 생물과 유기물은 발효나 부패를 거쳐 다시 순환하지만 ‘돈’이라는 것은 꾸준히 늘어날 뿐 부패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부패하지 않는 경제는 문제가 있다. 다함께 경제를 부패시키자.

자본론 이야기

마르크스가 이렇게 쉽고 재밌었단 말인가. 이름만 많이 들어봤지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에서 설명하는 자본론은 너무나 재미있었다. 원래 자본론이 이렇게 쉽게 재밌을리는 없을것 같은데, 궁금해서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다. 또한 요즘들어 젊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느끼는 피로를, 백년도 전에 간파한 마르크스는 역시 그냥 네임드가 아니였다. 이참에 우리모임도 자본론을 읽는거다.

이 책에 자본론이 구성되는 과정이 쉽고 재밌게 표현되어 있어서 아래에 정리해본다.

자본주의의 기본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구조 장치의 근본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이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데,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만드는 열쇠는 바로 노동력에 있다. 노동력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이윤이 생기니 자본가가 좋다.

상품이란 무엇인가.

  • 사용가치가 있있어야 한다 : 누군가가 그걸 필요로 해야 한다.
  • 노동에 의해 만들어질 것
  • 교환할 수 있는 것
    교환할 수 있는 대상의 크기를 ‘교환가치’라고 한다.

가격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 노동시간의 크기다.
수요와 공급이 아니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특징

  • 사는 사람은 자본가뿐이다.
  • 교환 가치는 임금이다.
  • 임금은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활비 및 양육비용과 기능 습득에 비용을 합한 금액으로 구성된다.

이윤의 발생 과정

노동자에게 일을 더 많이 시킨다. 그럴수록 노동자는 힘들어지지만 노동자인 이상 어쩔 수 없다.

기술혁신

기술혁신은 더 많은 상품을 만들게 하고. 더 많은 이익을 남기려는 듯이 보인다.
아니다. 기술혁신은 상품의 가격을 떨어뜨리고, 노동자의 생활비와 양육비가 낮아진다.
그 결과 노동력의 교환가치가 떨어진다. 따라서 임금도 낮아진다.
또한 기술혁신은 노동을 단순하게 만들기 때문에 기술습득 비용을 낮춰 임금도 낮아진다.

음식

음식 값이 쌀수록 생활비가 싸고, 임금이 싸진다.

노동자가 어떻게 상품이 되었는가

노동자가 될 수 있는 조건:
자유로운 신분일 것.
생산수단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

결론

책 자체도 재밌었고, 내용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내 고민과 맞닿는 부분이 있어 반가웠던 것 같다. 저자 와타나베 이타루는 자본주의를 벗어난다기 보다는 자본주의 안에서 지혜롭게 사는 방식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 방법은 바로 이윤을 남기지 않는 것. 자본주의에서 불어나는 돈이 문제를 만든다고 보고, 돈으로 이익을 남기지 않는 결심을 한 것이다. 어려운 결단이고, 환영하는 바이다. 그런 방식으로 더 사람답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바로 이웃인 우리 한국만 봐도, 사람들이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돈에 집착하게 된다. 그럴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보기엔 이타루의 이야기도 한낱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수도 있다. 어쩌면 거기엔 완벽한 해법은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건 안된다며 책을 덮기보다는 이런 식의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만약 나라면 하는 생각으로 더 좋은 생각을 떠올려 보는건 어떨까. 그런 생각들이 모여 실천을 이룬다면 언젠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산이 움직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아래는 인상적인 구절들

이런 진리를 깨달은 우리 부분은 돈도 ‘부패’하게 하고, 경제도 ‘부패’하게 하면서 지역사회와 함께 살아가는 중이다. 이런 움직임이 소리 없이 확산되고 있다. 언젠가는 지역사회를, 국가를, 나아가 세계를 변화시킬지도 모른다. 15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일본의 변두리 작은 시골마을에서 소리없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프롤로그>

과연 시스템의 바깥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p.34

노동자가 혹사당하는 이유는 자본가(경영자) 탓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구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며, 자본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구조에 편입되어 노동자를 학대한다는 것이다.
<자본론> 안에는 마르크스의 독특한 표현이 나온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구조 장치의 근본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이라고 말한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데,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만드는 열쇠는 바로 노동력에 있다. 노동력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자본가가 좋아하는 이윤이 생기니 노동자는 혹사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43 마르크스와 노동력 이야기

상품 가격의 비밀: 평균적인 역량을 기준 삼아 노동시간을 어림잡고 교환가치를 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정해진 교환가치의 크기를 돈이라는 척도로 표현한 것이 상품의 가격이다.
마르크스의 생각에 따르면 가격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교환가치에 있고, 수요와 공급은 가격을 변동시키는 2차적 요소라고 한다.
p.47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기술혁신은 결코 노동자를 풍족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자본이 노동자를 지배하고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p.63

기술혁신은 대부분의 경우 노동을 단순하게(또는 쉽게) 만드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빵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이스트를 환영했던 이유도 노동의 수고를 확 줄여주었기 때문이다. 언뜻 제빵 기술자에게도 좋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긴 안목에서 보면 사실은 노동자의 목을 죄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도 역시 노동력의 교환가치(임금)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노동이 단순해지면 기술은 필요 없어진다. 그러면 기술습득 비용이 굳는 만큼 임금도 낮아지는 것이다.
p.67 균과 기술혁신 이야기

이스트를 사용해 누구라도 쉽게 빵을 만들 수 있게 되면 빵 값이 싸지고 빵집 노동자는 싼 값에 계속 혹사당하게 된다. 또 공방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은 단순해져서 빵집 노동자는 아무리 오랜 시간을 일해도 빵집 고유의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다.
p.70

일(노동력) 값을 깎아내리기 위해 음식(상품) 값을 내린다는 것이 마르크스가 밝혀낸 자본주의의 구조다.
p.69

바로 이런 자연의 섭리를 결제활동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 각자의 생을 다하기 위한 배경에 부패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면 부패하는 경제는 우리 각자의 삶을 온화하고 즐겁게 만들어주고, 인생을 빛나게 해주지 않을까?
… 균이 했던 것처럼 사람이나 지역도 부패하는 견제를 통해 우리 안에 있는 힘을 발휘하면 삶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p.85 부패하지 않는 빵과 부패하지 않는 돈

우리가 들여온 유기재배 쌀은 대량의 동물성 퇴비(단백질)를 먹고 자랐다. 그래서 영양과다 상태, 생명력이 약한 상태였던 것이다. 산과 들에는 대량의 동물성 퇴비 따위는 없다. 따라서 작물에 단백질이 포함되는 비정상적 사태를 천연 누룩균이 감지하면 ‘이상하다. 분해해서 흙으로 되돌리자.’라는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자연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를 해소하기 이후ㅐ 천연 누룩균이 단백질을 분해하러 달려들게 되고, 그 탓에 밀에 포함된 단백질(글루텐)까지 모조리 분해되어 빵이 부풀지 못하는 것이다.
p.137 균의 목소리를 들어라.

엔데는 돈을 ‘사람들이 생활에서 사용하는 교환을 위한 돈=빵집에서 쓰는 돈’과 ‘자본이 사업을 통해 불리려 하는 돈=자본으로서의 돈’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이 두 종류의 돈에 동일한 ‘법정통화'(엔, 달러 등)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경제와 삶이 혼란을 일으킨다고 지적하며, 그렇다면 이 두 종류의 돈을 나누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빵집에서 쓰는 돈으로는 도시를 목적으로 한 특정 지역에서만 쓸 수 있는 돈, ‘지역통화’를 쓰자고 제안했다.
p.177 참다운 시골살이는 순환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은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노동자가 모두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공산주의(사회주의)를 지향한 것이다. … 오히려 이 시대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생산수단을 가지는 길이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 의미를 잘 표현한 것이 ‘소상인’이라는 단어
p.185 착취하지 않는 경영형태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소상인의 시대가 아닐까? 교통과 통신 인프라가 정비되어 규모가 작아도 충분히 돌아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인태넷과 소셜 미디어는 정보의 수집과 발신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이 얼마나 큰 무기인가?
p.186 착취하지 않는 경영형태

Tags : #시골빵집 #자본론

내 목소리는 억지로 허세를 부리는 듯한 억양이어서 하찮은 잔꾀가 부끄러웠다. 그래도 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부를 수밖에 없었는데, 이윽고 마호니가 나를 알아보고는 "어." 하며 큰 소리로 응답했다. 마호니가 들판을 가로질러 나에게로 달려올 때 내 가슴은 반가움으로 얼마나 뛰었던가! 그는 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듯이 달려왔다. 그리고 나는 뉘우쳤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그를 약간 무시하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뜻밖의 만남>

그 어둠 속을 뚦어져라 쳐다보고 있노라니 나 자신이 해영에 쫓겨 농락당하는 한 마리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의 두 눈은 번민과 분노로 불타올랐다.
<애러비>

그녀는 무기력한 짐승처럼 아무런 반응 없이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사랑이나 작별 또는 인식의 아무런 표시도 그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이블린>

저번주 독서모임에서 <더블린 사람들>이 선정되어 책을 읽은 후기와 토론 후기를 정리해 본다.

더블린을 소재로 한 <더블린 사람들>은 13편의 짧은 단편들을 묶은 첫 작품이다. 내가 읽은 건 펭귄클래식코리아 선집이었는데, ‘음울한 도시의 초상’이라는 긴 서문이 나온다. 그 서문에서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제임스 조이스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와 함께, 각각의 글이 쓰여진 배경을 하나하나 짚어나가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지치게 하는 느낌이 있었다. 본 소설은 훨씬 가볍고 재밌었기 때문에 이 서문은 맨 뒤에 넣는것이 나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은 생각보다 쉽고 경쾌하다. 5~10장 내외의 분량으로 눈에 그려지는 묘사와 여운이 남는 마지막 결말이 맘에 들었다. 그의 결말짓는 방식은 담담히 때로는 경쾌하고 밝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구김이 있고 삶이 힘들지만 나쁘지 않다. 삶은 원래 이런 것이니까. 아주 낙담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그러다 ‘앗’하며 소설은 갑작스럽게 끝난다. 밝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의 얼굴에 아주 잠깐 슬픈 표정이 스친 순간 영상과 소리가 어색하게 정지하듯이. 우리 주변의 이야기같은 생활들은 그 환경에 비해 밝고 긍정적이라 왠지 더 서글펐고, 애써 슬픔이나 실망을 감추려는 듯이 보인다. 일상이라면 1초도 안되는 새에 지나갔을 그 순간과 감정을 깊고 진하게 증폭시킨다. 아. 하는 탄식과 함께 단락은 끝나고 다음 편의 제목이 펼쳐진다. 토론하기전엔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런 부분이 불편하다는 분도 계셨다.

단편은 저마다 다른 주제와 인물들을 다룬다. 20세기 초반 더블린을 무대로 한다는 공통점외에 인물들의 신분이나 연령, 위치나 맥락 모두 다르다. 삶의 굴곡과 위에서 아래까지 가진 인물들을 다루면서, 아니 도대체 나이가 몇살이길래 했던 그의 당시 나이는 23살. 젊은 조이스가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동안 인생의 우여곡절이 있었다고는 하나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특히나 중년의 사랑을 다룬 ‘가슴 아픈 사연’은 가슴을 울렸다. 24살의 나이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걸출한 사랑 에세이를 쓴 알랭 드 보통도 생각이 난다.

마지막 단편이며 강신주의 감정수업에도 실린 ‘죽은 사람들’혹은 ‘죽음’은 비교적 가장 난해했던 소설이다. 아내를 너무나 세속적이라고 좋지않은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그건 나였구나 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주인공.

읽는 내내 백년 전 더블린의 이야기가 다른 나라 이야기 같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자녀들에게 집작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라던가, 내가 있는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을 동경하고 떠나고픈 열망이라던지, 찌질하고 갈 곳없는 젊음의 방황이라던지, 우리네가 벗어나기 힘든 질투와 멸시의 감정이라던지. 그 많은 감정들이 짧은 장면들로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어쩜 이렇게 간단하게도 나타낼 수 있을까. 참 잘쓰는구나 라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분명 지루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던 단편집과 재밌었던 토론. 오랜만에 괜찮은 소설을 만났다.

http://herocomics.kr/viewer/list/#JE

오랜에 정말 재밌게 읽었다! 마지막이 좀 아쉽긴 하지만 깔끔한 결말이라는 생각도 들고.
해리포터시리즈를 제작했던 David Yates가 영화화를 한다니 기대된다.
오랜만에 정말 즐겁게 읽은 만화.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 이해가 안가거나 실망을 했는데,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모든 판단이 (전부는 아니겠지만)다른 이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번역을 담당한 홍영남 교수의 번역이 거의 쓰레기에 가까울 정도라서 ‘원서를 읽는게 차라리 쉽다’라거나, ‘내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평이 많았는데, 나중에 개정판이 나왔지만 내가 본 책은 개정전에 출판된 원성이 자자한 판본이었다. 일단 아래 내용들은 그걸 몰랐을때 쓴거고. 지금도 개정판을 읽으면 이런 의견에 차이가 있을까 의심이 되긴 하지만, 나중에 개정판을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홍영남이라는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인걸까.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읽으며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그 사람의 번역에 비해 도킨스의 책은 너무나 쉽게 이해가 가게 쓰여졌다니, 읽기를 원하는 사람은 홍영남 교수가 번역하지 않은 책을 보거나, 원문을 보는 편이 좋을것 같다.

p. 100

노화에 관한 메더워의 이론
어떤 개체를 죽게 하는 유전자를 치사 유전자라고 할 때, 어렸을적 발현하는 유전자는 후대로 전해지기 어렵다. 반면 노년에 발현하는 유전자가 있다면 후대까지 이어오기가 쉽고 그런 경향성으로 많은 개체들이 생식 이후에 발현하는 치사 유전자를 폭 넓게 가졌다는 말이 설명이 된다.
“메더워가 강조하는 점은, 선택은 다른 치사 유전자의 작용을 늦춰 주는 효과를 가진 유전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좋은 유전자의 효과를 빠르게 하는 효과를 가진 유전자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진화의 많은 부분은 유전자 활동이 시작되는 시기에 유전적으로 제어된 변화로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특성이 모여 젊음과 늙음을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이론으로 부터 인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재밌는 것이 있다. 처음에 특정한 연령 이전에는 번식을 금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한계를 수백년에 걸쳐 점점 늘려나간다. 이런 방법을 이용하면 수명을 수백세까지 연장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비인간적이긴 하지만 말이 되는 방법이다.

p. 142

로렌츠는 그의 저서 ‘공격에 대하여’에서 동물의 싸움, 즉 ‘공격’은 무분별의 억제가 가능한 신사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동물의 싸움이 복싱이나 펜싱의 규칙처럼 규칙에 따라 싸우는 형식을 갖춘 시합이라는 것이다.
동물이 싸움에서 대체로 죽이지 않는 것은 경쟁자를 죽여도 뚜렸한 이득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는 싸울 것인가 싸우지 않을 것인가의 결단에 앞서 무의식적이더라도 복잡한 ‘손익계산’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보여준다.
메이나드 스미스는 ‘게임 이론’을 이용해서 이를 설명했는데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SS)라는 것이다. 이 ‘전략’이라는 것은 미리 만들어진 프로그램의 행동 방침’인데, 예로써 “상대를 공격하나, 그가 도망치면 쫓아가고, 응수해 오면 도망쳐라”이다. 일단 모든 개체가 이 전략을 (유전적으로) 사용한다면 자연 선택은 이 전략에서 이탈되는 행위를 벌할 것이다.

유전자의 작용을 파헤치는 이런 이론들을 보고 있자니, 참 길고 지난한 ‘역추적’과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북극해 근처에서 발견된 일본어가 적인 코카콜라 캔을 보고 이것이 어떻게 여기까지 도달했을지, 논리와 조건과 상상력을 발휘해서 역으로 유추해 보는 식으로 말이다. 북극과 일본은 차라리 가깝다. 그게 아무리 멀어보여도, 자연선택이라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우리가 볼수 있는 ‘남겨진 것’들 뿐인 단서들에게서 몇만 몇억년을 유추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과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p. 175

근친자-혈인자kin-가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이 평균보다 높다는 것을 보이기 쉽다. 이것이 어미의 새끼에 대한 이타주의가 흔한 이유일 것이라는 것은 오래 전에 밝혀진 사실이다.

도킨스는 전 장에서 ESS(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에 대한 가정을 전개시키며 ESS가 타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번 장에서도 유전자의 이타주의에 관해 논리 실험을 전개시켰는데 이는 전장과 비슷한 방식이지만 전혀 타당해보이지 않는다. 이타주의가 이런저런 식으로 이익을 줄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 다음 그렇다면 어떻게 개체들이 자신과 가까운 근친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인가. 이는 명백하게 순환오류로 보여진다. 그가 근친 유전자간의 이타주의를 밝히고자 했다면 동물에게서 근친관계에 따른 통계적 이기·이타주의적 행동을 비교했어야 옳다. 여기에서 보이는 실험적 단서가 단지 새끼에게 보이는 어미의 행동과 한배에 4마리를 출산하며 9마리의 무리를 이루는 아르마딜로 뿐이라는 것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근친에 대한 이타주의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개체의 지능에 의한 합리적인 판단이 아닌 유전자가 가진 성질이라고 볼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가. 원숭이가 양자를 키우는 행위를 단순히 규칙의 오용이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자신이 만든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는 오류라고 단정짓는 듯 보인다.

p. 267

이 자식은 이제 충분히 컷기 때문에 우리들 중 누구든 한쪽에서 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상대가 자식을 버리지 않을 것을 내가 확실할 수 있다면, 지금 버리는 것이 나에게는 이득이 될 것이다. 만일 내가 지금 떠난다면 나의 배우자는 자기의 유전자에 대해 최선의 수법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유전자가 살아남았을때 그 반대되는 행동이 생존에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과정들(이런 판단이 저런 판단보다 더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을 유전자 단위에서 한다는게 가능한 것인가. 그런 설명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 없이 결과를 가지고 유전자의 의도를 파악하는건 너무 억측같아 보이고 중반부-이기적인 유전자에 대한 사례들-는 너무 작위적이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

p. 270

이와 같이 수컷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많은 투자를 강요하고 있는 암컷이 만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로 수컷의 버리는 행위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동물들이 이러한 고차원적인 가정법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관건이 아닐까. 이런 가정의 가정에선 아무런 실험적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10만년 뒤에 발견된 유골을 보고 상상할 수 있는 서사시와 다를게 뭔가. 단순히 결과를 가지고 동물의 전략을 유추해 낸다는게 가능한 것인가. ESS와 같은 전략이 있을수 있다란건 재미있는 생각이라고 생각하며 가능할수도 있다고 보지만 모든 상황에 끼워 맞을 수 있는 몇단계의 가정법을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전략이 있다고 해도 이것과 다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유추해낸 동물들의 전략이 우리 너무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으로 상상하는 것처럼 보여 설득력이 떨어진다. 나는 계속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실험적 근거’를 원하는데 여기선 자꾸 ‘암컷과 수컷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건 이런저러해서 이런 것일수도 있다’라고 자꾸 사례만 든다. 왜 도대체? 차라리 소설을 쓰지

계속 보면서 드는 생각은 실험적인 근거는 적은반면 이를 통해 내세우는 주장은 방대하다는 것이다. 그것에 따른 다른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즉 “A는 이러저러하다. 근거는 ·····. 이를 바탕으로 B가 C하는것은 물론 D를 했으리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A는 이를테면 암컷에 비해 수컷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수컷과 암컷이 비슷한 비율임을 설명하는 것(생물학적, 통계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 이후에 여러가지 가설들(메이나드 등등)은 근거가 없다. 동물들이 저런 생각을 해서 저럴 것이라는 근거가. 그렇게 생각하면 맞는것 같다.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또한 이기적인 유전자론에 맞지 않는 사례는 ‘오류’, ‘오작동’이라고 부르며 배제하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자신의 의견과 맞지 않는건 예외라고 하는 방식이 설득력이 충분하지 않다. 일반화되지 않더라도 학술적으로 통용되는건 통계학적으로 충분히 유의미한것인데, 자연선택설에서 살아남은 생존 유형을 단순히 오작동이라고 해도 되는것인가. 만약 가능하다면 자연선택설에서 오작동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p. 334

내기를 걸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때 나는 하나의 기본 원리에 돈을 걸 것이다. 바로 모든 생물은 자기 복제를 하는 실체의 생존율의 차이에 의해 진화한다는 원리이다.

meme
문화·의식은 번식력이 있다. 그럴까?

신에 대한 인식은 전염 감염과 같은 형태로 생겨났을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처음 인간은 패턴을 찾는 능력이 없었지만 유인원 어딘가에서 이것을 획득했고 이걸로 인해 생존률이 높아졌다. 지금의 인간은 자연 현상이나 별자리에서 패턴을 찾았는데 이것이 신이 있다고 가정한 첫걸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믿음을 가진 부족이 더 단합이 잘되고 생존률이 높아졌을 것이다.
즉 나는 인간이란 본디 무엇인가를 믿기를 좋아하거나, 어떤 결과에 원인이 있기를 추종하는 버릇이 있다고 본다. 신이란 개념이 전염을 통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의식’을 통제하기 위해 ‘믿는 것이 필요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생각이다.

p. 341

유전자는 장래의 유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사본 수를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표현할 경우, 실제의 의미는 “우리가 자연계에서 유전자가 나타내는 효과는, 장래의 유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수를 증가시키려고 행동할 것 같은 유전자다”라는 것을 뜻한다.

과연 그럴까? 진화론과 반대로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단 과일은 먹어치우기 때문에 단 과일은 멸종하고 번식되는 건 달지 않는 과일밖에 없다고 할때, 과일은 달지 않은 쪽으로 진화되어 왔다. 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경향성을 보인다고 할 때 그것을 마치 의도한것처럼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뭐 은유로써 그렇게 말 할 수 있다고 쳐도, ‘과일나무의 유전자가 맛좋은 과일과 맛없는 과일을 3:7로 열리게 할 경우가 접근하는 동물들의 수를 계산한 끝에 생존에 가장 유리한 숫자임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라는 것처럼 어이없는 전개같다.

p. 395

굶주린 동료에게 수혈해주는 흡혈박쥐 이야기

p. 407

날도래, 달팽이의 흡충 이야기
바이러스는 너무 치명적일 경우 숙주를 너무 빨리 전멸시키기 때문에 오히려 전염이 덜 된다. 그래서 오래 살아남는 바이러스는 덜 치명적이고 잠복기도 길어야 한다. 이를 두고, 바이러스는 덜 치명적이게 진화했다. 라고 할 수 있는가. 단지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살아남지 못했을 뿐이다. 이는 유전자에게 아무런 학습행위를 일으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즉 전혀 경향이 없는 것이다.

그동안 읽고 싶었던 퀀텀 유니버스를 이제야 읽게 되어 오랜만에 과학책을 정독했다. 양자역학에 대한 팟캐스트도 들어보고 책도 여러권을 들춰보았었는데, 깔금하게 납득되는 책들이 없어서 더욱 다른 책을 찾아 해멨었나보다. 이 책이라고 양자역학을 정말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책들과는 다른 접근과 나름 이해시키려 애쓰는 모습에 감동했다고나 할까. 그런 면에서 읽으면서 기분이 좋았던 책이다. 이해됬는지의 여부와는 전혀 별도로 말이다.

좋았던 점

이정도면 이해할수 있다며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단점

이해되지 않는다… 절반이상이 독자를 이해시키려는 시도이지만… 오히려 수식이나 다이어그램을 지나서 아 이건 이렇구나 하고 넘어가게 된다.

그럼에도 좋았던 점

양자역학이 어떻기 태어났고, 그것의 의의는 무엇이며 우리가 밝혀난 지점과 밝혀내지 못한 점. 양자역학의 대단한 점과 우리가 알고 있지만 원인을 모르는 지점이 어딘지 속 시원하게 밝혀 준다. 그런 면에서 솔직함이 다가오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상깊은, 기억하고 싶은 부분들

p. 87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물체가 아니라 정보information에 적용되는 제한조건이다.
··· 입자 하나가 우주 반대편으로 순식간에 이동한다고 해서 입자와 관련된 정보까지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입자가 어느 방향까지 나아갈지 예측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 뭐냐;;;)

p. 89

(여기서 시계바늘은 전자가 발견될 확률을 표시하는 일종의 위상)
시계의 상태를 결정하는 법칙은 다음과 같다 – 미래의 시간 t에서 처음 위치로부터 x만큼 떨어진 곳의 시곗바늘은 반시계방향으로 x²에 비례하는 양만큼 돌아간다.
일상적인 말로 풀어쓰면 무거운 입자일 수록 많이 돌아가며, 원래 위치에서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많이 돌아가며, 시간이 많이 흐를수록 적게 돌아간다. 이것은 시계의 초기배열이 주어졌을 대 미래의 한 시점에서 이 시계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알고리듬이다.

p. 92

간단히 말해서 작용량action은 주어진 물리계의 특성을 좌우하는 양이다. 그런데 자연은 왜 근복적인 단계에서 이런 양을 선택했을까? 마땅히 떠올려야 할 질문이지만, 애석하게도 답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시계가 더도 덜도 아닌 mx²/t만큼 돌아가는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1669년에 작용량의 개념을 정립하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구체적인 응용과정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p. 132

파장이 짧아졌을 때 드브로이 방정식이 나타내는 변화를 분석하면 좀 더 깊은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 파장이 짧다는 것은 동일시간을 가리키는 시계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드브로이는 “짧은 파장은 큰 운동량에 대응된다”고 했다.

p. 214

이 책에서 지금까지 내린 결론 중 가장 신기하면서 이질적인 것 하나를 고른다면 나는 주저 없이 ‘입자들의 우주적 연결’을 꼽고 싶다. 우주에 존재하는 개개의 원자들이 다른 모든 원자와 연결되어 있다니, 이 세상의 모든 헛소리를 합쳐도 이보다 황당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에는 약 10⁸⁰개의 양성자가 존재하고 있으므로, 10⁸⁰개의 전자를 가두고 있는 우물형 퍼텐셜이 10⁸⁰개의 양성자에 의해 향을 받고 있는 셈이다. 어디선가 전자 하나의 에너지 준위가 바뀌면 다른 모든 전자는 그 사실을 즉각적으로 판단하여 “두 개 이상의 페르미온은 동일한 에너지 상태를 점유할 수 없다”는 배타원리에 위배되지 않는 쪽으로 변화를 시도한다.
전자들이 서로 상대방의 변화를 ‘즉각적으로 인지한다’는 주장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p. 258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는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이다. “

p. 273

“하나의 전자가 x에, 나머지 전자는 y에 도달하면서 광자가 관측자의 눈에 들어올 확률은 얼마인가?” 두 개의 전자가 각각 x, y에 도달하면서 도중에 방출된 광자 하나가 관측자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다이어그램을 찾아서 여기 해당하는 시계들을 모두 더한 후 최종시계의 크기를 제곱하면 된다. … 이런 경우에는 광자와 눈 사이의 상호작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모든 과정을 완벽하게 서술하려면 광자에 반응하는 관측자의 두뇌까지 계에 포함해야 하고, 두뇌를 이루는 모든 입자의 위치까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양자적 관측문제의 본질이다.

p. 278

그러나 놀라게도 과거로 가는 소립자는 물리법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디랙은 1928년에 이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p. 306

양자역학은, 현대문명의 일등공신인 트랜지스터에 응용되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이 세계를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배라보지 않았다면, 컴퓨터와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이기는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양자역학은 단순히 관측된 현상을 설명만 하는 이론이 아니다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과 특수상대성이론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반입자의 존재를 예견했고, 이 가상의 입자는 얼마 후 실험실에서 발견되었다 원자의 안정성을 좌우하는 입자의 스핀도 이론의 타당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입되었다가 흣날 물리적 실체로 판명되었다.

과학은 관측된 현상을 설명하고 아직 관측되지 않은 현상을 예견하면서, 우리의 삶을 돌이킬 수 없는 쪽으로 서서히 바꿔왔다. 이것은 과학과 그 외의 분야를 구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과학은 ‘자연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제아무리 뛰어난 석학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의외의 사실을 밝혀내는 막강한 도구이다. 과학은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이며, 과학이 찾은 진실이 초현실적이라면 그 초현실은 곧 진실이 된다. 이런 과학 분야에서 가장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이론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이 책의 앞부분을 읽고 있자면 우리가 시에서 감동을 받는 이유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전혀 다른 사람들은 우리 인간 개체들이 하나의 시에서 비슷한 인상과 감동을 받는다는것은 정녕 놀라운 일이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상상력이고, 이를 연구하는 학문이 상상력의 현상학이다.(인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대부분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서론부분이 특히 힘들어서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고, 그 이후인 1장 집, 2장 집과 세계는 그나마 조금 나았다. 다시 그 이후부터는 이해할수 없는 장의 연속들이어서 멍하니 글씨를 읽고 있지만 어느새 머리로는 다른생각을 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어온 책과는 많이 다르다는 느낌과, 이 책이 어떤맥락에서 시작했고 어느 지점인 것인가. 내가 어느 부분을 이해를 못하고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해야만 하는가.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던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 인식하지 못했던 내 독서의 한계를 넓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지식이 참 많다고 느꼈고, 작가가 전재한 – 독자들이 (당연하게도) 읽고, 알고,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한 부분이 상당해서 마치 나로서는 거대한 코끼리를 그린 그림을 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를테면 80년에 걸쳐 그려지고 있는 코끼리 그림의 넓적다리 부분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시작부터 지켜 본 사람들은 ‘이번 넓적다리는 참 조화로워’, ‘지난번 앞다리보다도 묘사를 잘했는걸’이라는 감탄을 쏟아낼 무렵, 나로서는 이 그림이 어떤 동물인지, 새인지, 돌을 묘사한건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더듬거리고 있는 지경이고, 마침내 넓적다리를 다 매만지고 나서야 아 이게 어떤 포유동물의 다리일지도 모르겠다. 하는 추측을 하게 된 것이다.

책의 제목에 많은 힌트가 들어있는 것 같다. 공간의 시학, 공간에 대한 시적 학문 정도의 느낌이랄까. 이 외에도 책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으로는 상상력의 현상학이 나오는데, 현상학이라는 것이 생소하기도 하고, 현상학과 대비하여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비판적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비평들을 보며, ‘아 현상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는 한 방법인가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참고. 후설의 현상학

예를 들어, 어떠한 물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을 우리의 의식을 통하여 인식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물체와의 관계를 맺게 되고 그 물체에 대해 인식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떠한 물체가 존재하는데,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음은 물론이며, 그 물체의 실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의식의 지향성’이라 하며, 후설 철학의 대표적인 개념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의식이 어떠한 지향성을 갖는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별’이라는 대상을 바라본다고 할 때, 그것을 과학적 탐구의 대상인 실체로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그것에 대한 시나 노래를 짓는 등의 예술적인 대상으로 받아들일 것이냐는 그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의 의식이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다르다. 이는 실증주의에서 실체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러한 의식의 가치판단과 같은 주관성을 부정한 것은 명백한 오류임을 보여준다고 후설은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실증주의가 철학의 목을 잘랐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설은 인간의 의식에서 드러나는 그 자체로의 ‘현상’을 서술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철학적 경향을 ‘현상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상학에 대해선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게 있다는 것 정도를 알게 된 것을 기념으로 여기며, 철학에 대해서 방금 눈 뜨기 시작한 나로선 내가 알고 있는 바닥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철학자라고 해봐야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중에서는 철학자가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알랭드 보통은 어떠한 현상에 대한 인물의 심리적, 사회적, 역사적 분석을 하는 경향이 있다면, 움베르트 에코는 인과관계에 초점을 맞추는(것처럼 보이고), 강신주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사회적 진실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가스통 바슐라르가 재밌다고 느낀 부분은 이것이다. 그는 이미지와 공간을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철학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가스통은 살고 있는 집의 형태와, 그 집과 관계맺는 나의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게 현상학의 요지가 아닌가 싶다. 나와 관계맺지 않는 사물은 존재한다고 볼 수 없고, 모든 사물은 나와의 관계, 내가 어떻게 인식되느냐에 따라 다르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어렵다.

이 책이 어려운 점중의 하나는, 나에게 생소한, 지금은 쓰지 않는 한자어가 너무 많이 쓰였다는 점. 문체를 보자면 일부러 어렵게 썼다기 보다는 당시의 번역습관정도가 아닐까 싶다. 지금본다면 충분히 우리 말로 더 쉽게 쓸 수 있을것 같아서 아쉽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현상학적 접근이 너무 이질적이라는 점. 프랑스 철학의 특징인지, 현상학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상상력을 (마치)과학적인 것처럼 접근한다는 점. ‘~하다’, ‘~인 것처럼’, ‘~인 것이다’라는 어미를 붙인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었고,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는 ~하게 된다’라는 표현을 볼 때마다 ‘나는 아닌데!!’라며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곤 했다.

또 하나의 어려운 지점은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시적인 접근을 한 것처럼 보이는데, 시를 어려워 하는 나로선 참 힘들었다. 시와 상상력이라는 것, 아직 나는 ‘시’라는 것은 해석하기 어려운 완결된 ‘문구들’처럼 보이고, 물론 그렇겠지만. 상당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가 접근하는 시읽기를 보자면 거기엔 보편적인 해석의 영역이 있는 것 같아서, 그런 이해가 선행된다면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드는 것이다.

또 한가지의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이라면, 상상력의 현상학, 공간의 시학이 다 좋다고 해도, 뭐랄까 시선이 편협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앞서도 다양한 철학자를 예로 들었지만, 저마다 철학자들은 각각의 세상을 보는 범위가 다른 것처럼 보인다.물론 그 정도에 따라 좋고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보기엔 이런 상상력의 현상학, 공간의 시학은 참으로 그 범위가 세밀해 보이는 것이다. 내 눈앞에 돋보기를 갖다 대는 느낌이랄까. 지금 같은 암울한 현실 – 개인의 안위, 행복보다도 생존이 어려운 현실 세계에서 이런 미시세계에 집착하는 듯한 느낌이 그리 공감가지 않는 시선의 영역처럼 느껴져 불편하게 느껴졌다.

마무리하자면, 나로서는 이 책이 완전히 이해가지 않았기 때문에, 좋고 나쁘고를 말할 수 없는 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읽어 온 독서와도 방향이 전혀 달랐고,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코끼리의 뒷다리처럼, 포유동물의 다리인가보다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징조라고 생각한다. 꽉 채워진줄 알았던 내 지도에 상당부분이 빈 공간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느낌이 나쁘지 않다. 몇시간을 이 책을 읽으며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과 싸웠는데, 그 고생에 비하면 결과는 일면 작아보여도, 오랜만에 책 읽는 체험을 한 느낌이다. 이상 끝!

오랜만에 한 예술잡지를 샀다. 가끔 서점에서 들춰보던 예술잡지였는데 이제보니 경향에서 낸 잡지였고, 내용에 호기심이 가서 한번 사 보았다. 그 맨 처음에 편집자의 사설을 읽다 속이 터져버렸다.

이 속터짐은 너무도 다른 비교 때문이다. 평소라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 법했을텐데, 그 비교 상대는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이다. 하루키이기도 하고 어쩌면 일본 특유의 말투이기도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내 느낌일 뿐이고, 내가 수많은 일본 글을 읽고 통계 내 본것이 아니니 확신은 없다.

그 발단은 며칠전에 사 본 하루키의 잡문집이었는데, 그동안의 매체에 기고한 길고 짧은 글들을 모아 ‘잡문집’이라 하여 낸 책이다. 자신의 글을 ‘잡문’이라 하다니 과연 그답다. 하루키의 글 뿐만이 아니라 일본인의 글에서 비슷하게 풍기는 인상이 있다. 가볍다, 날카롭다. 짧지만 핵심을 짚는다. 무거울라 치는 찰라에 슬쩍 발을 빼거나 딴청을 피운다. 자기 조롱에서 문장의 분위기를 가볍게 띄우는가 하면 긴 창을 들고 달려나와 훅 찌르듯 핵심을 파고든다. 일본의 문장은 그런 맛이 있다. 역시나, 하루키의 글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했다면 그냥 그려려니 하고 넘어갔을텐데, 오늘 읽은 사설이 방점을 찍는다. 이건 일본과 한국의 문장 스타일의 상대성을 논하기 이전에 너무 못썼다. 글을 읽으라고 썼나 싶으며 종국에는 ‘이걸 뭐하러 쓴거야’라는 감상을 남긴다. 예를 들면 이렇다.

‘··· 우리네 예술가들의 현실에서도 그처럼 의결한 삶이 가능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도 스친다. 그런데 엄연히 존재하는 실상과 견줘 보면 그건 단지 하나의 이상에 머문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선 실현 불가능한, 사고의 범주에서나 이륙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있는 탓이다. (중략)’

‘즉, 작가들이 아무 돈 걱정 없이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으면 좋겠다가 “돈이 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거나 “전념했으면 좋겠다”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림들이, 그 모든 예술작품들과 예술가들이 문화적 관점에서 인류에게 얼마나만큼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확답은 언제까지든 유효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끝)’

이게 말이야 방구야. 요새 이런 글들을 많이 본다. 자신의 속내를 숨기면서 고상한 척하고자 하는 고귀한 영혼들의 말돌리기들, 신문에서-정당 대변인에서-대학의 학생 리포트에서,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는 그 제스춰 취하는 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속터지기가 그지 없는 것이다. 이 지리멸렬하고 맺음없는 단어들을 보고 있자니 자기가 받은 폭탄을 재빨리 옆사람에게 한없이 돌리고 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우리 말에는 색과 맛이 다른 재료 들이 많다. 일본 글에서 볼 수 없는 복잡 미묘한 단어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쓰임은 죄악이다. 차라리 제목만 덩그러니 써서 내용을 상상하게 하는 편이 더 낫겠다. 한페이지 넘겼을 뿐인데 이러면 나머지 장들을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