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인 유전자를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 이해가 안가거나 실망을 했는데,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모든 판단이 (전부는 아니겠지만)다른 이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번역을 담당한 홍영남 교수의 번역이 거의 쓰레기에 가까울 정도라서 ‘원서를 읽는게 차라리 쉽다’라거나, ‘내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평이 많았는데, 나중에 개정판이 나왔지만 내가 본 책은 개정전에 출판된 원성이 자자한 판본이었다. 일단 아래 내용들은 그걸 몰랐을때 쓴거고. 지금도 개정판을 읽으면 이런 의견에 차이가 있을까 의심이 되긴 하지만, 나중에 개정판을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홍영남이라는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인걸까.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읽으며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그 사람의 번역에 비해 도킨스의 책은 너무나 쉽게 이해가 가게 쓰여졌다니, 읽기를 원하는 사람은 홍영남 교수가 번역하지 않은 책을 보거나, 원문을 보는 편이 좋을것 같다.

p. 100

노화에 관한 메더워의 이론
어떤 개체를 죽게 하는 유전자를 치사 유전자라고 할 때, 어렸을적 발현하는 유전자는 후대로 전해지기 어렵다. 반면 노년에 발현하는 유전자가 있다면 후대까지 이어오기가 쉽고 그런 경향성으로 많은 개체들이 생식 이후에 발현하는 치사 유전자를 폭 넓게 가졌다는 말이 설명이 된다.
“메더워가 강조하는 점은, 선택은 다른 치사 유전자의 작용을 늦춰 주는 효과를 가진 유전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좋은 유전자의 효과를 빠르게 하는 효과를 가진 유전자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진화의 많은 부분은 유전자 활동이 시작되는 시기에 유전적으로 제어된 변화로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특성이 모여 젊음과 늙음을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이론으로 부터 인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재밌는 것이 있다. 처음에 특정한 연령 이전에는 번식을 금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한계를 수백년에 걸쳐 점점 늘려나간다. 이런 방법을 이용하면 수명을 수백세까지 연장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비인간적이긴 하지만 말이 되는 방법이다.

p. 142

로렌츠는 그의 저서 ‘공격에 대하여’에서 동물의 싸움, 즉 ‘공격’은 무분별의 억제가 가능한 신사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동물의 싸움이 복싱이나 펜싱의 규칙처럼 규칙에 따라 싸우는 형식을 갖춘 시합이라는 것이다.
동물이 싸움에서 대체로 죽이지 않는 것은 경쟁자를 죽여도 뚜렸한 이득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는 싸울 것인가 싸우지 않을 것인가의 결단에 앞서 무의식적이더라도 복잡한 ‘손익계산’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보여준다.
메이나드 스미스는 ‘게임 이론’을 이용해서 이를 설명했는데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SS)라는 것이다. 이 ‘전략’이라는 것은 미리 만들어진 프로그램의 행동 방침’인데, 예로써 “상대를 공격하나, 그가 도망치면 쫓아가고, 응수해 오면 도망쳐라”이다. 일단 모든 개체가 이 전략을 (유전적으로) 사용한다면 자연 선택은 이 전략에서 이탈되는 행위를 벌할 것이다.

유전자의 작용을 파헤치는 이런 이론들을 보고 있자니, 참 길고 지난한 ‘역추적’과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북극해 근처에서 발견된 일본어가 적인 코카콜라 캔을 보고 이것이 어떻게 여기까지 도달했을지, 논리와 조건과 상상력을 발휘해서 역으로 유추해 보는 식으로 말이다. 북극과 일본은 차라리 가깝다. 그게 아무리 멀어보여도, 자연선택이라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우리가 볼수 있는 ‘남겨진 것’들 뿐인 단서들에게서 몇만 몇억년을 유추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과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p. 175

근친자-혈인자kin-가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이 평균보다 높다는 것을 보이기 쉽다. 이것이 어미의 새끼에 대한 이타주의가 흔한 이유일 것이라는 것은 오래 전에 밝혀진 사실이다.

도킨스는 전 장에서 ESS(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에 대한 가정을 전개시키며 ESS가 타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번 장에서도 유전자의 이타주의에 관해 논리 실험을 전개시켰는데 이는 전장과 비슷한 방식이지만 전혀 타당해보이지 않는다. 이타주의가 이런저런 식으로 이익을 줄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 다음 그렇다면 어떻게 개체들이 자신과 가까운 근친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인가. 이는 명백하게 순환오류로 보여진다. 그가 근친 유전자간의 이타주의를 밝히고자 했다면 동물에게서 근친관계에 따른 통계적 이기·이타주의적 행동을 비교했어야 옳다. 여기에서 보이는 실험적 단서가 단지 새끼에게 보이는 어미의 행동과 한배에 4마리를 출산하며 9마리의 무리를 이루는 아르마딜로 뿐이라는 것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근친에 대한 이타주의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개체의 지능에 의한 합리적인 판단이 아닌 유전자가 가진 성질이라고 볼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가. 원숭이가 양자를 키우는 행위를 단순히 규칙의 오용이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자신이 만든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는 오류라고 단정짓는 듯 보인다.

p. 267

이 자식은 이제 충분히 컷기 때문에 우리들 중 누구든 한쪽에서 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상대가 자식을 버리지 않을 것을 내가 확실할 수 있다면, 지금 버리는 것이 나에게는 이득이 될 것이다. 만일 내가 지금 떠난다면 나의 배우자는 자기의 유전자에 대해 최선의 수법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유전자가 살아남았을때 그 반대되는 행동이 생존에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과정들(이런 판단이 저런 판단보다 더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을 유전자 단위에서 한다는게 가능한 것인가. 그런 설명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 없이 결과를 가지고 유전자의 의도를 파악하는건 너무 억측같아 보이고 중반부-이기적인 유전자에 대한 사례들-는 너무 작위적이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

p. 270

이와 같이 수컷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많은 투자를 강요하고 있는 암컷이 만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로 수컷의 버리는 행위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동물들이 이러한 고차원적인 가정법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관건이 아닐까. 이런 가정의 가정에선 아무런 실험적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10만년 뒤에 발견된 유골을 보고 상상할 수 있는 서사시와 다를게 뭔가. 단순히 결과를 가지고 동물의 전략을 유추해 낸다는게 가능한 것인가. ESS와 같은 전략이 있을수 있다란건 재미있는 생각이라고 생각하며 가능할수도 있다고 보지만 모든 상황에 끼워 맞을 수 있는 몇단계의 가정법을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전략이 있다고 해도 이것과 다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유추해낸 동물들의 전략이 우리 너무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으로 상상하는 것처럼 보여 설득력이 떨어진다. 나는 계속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실험적 근거’를 원하는데 여기선 자꾸 ‘암컷과 수컷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건 이런저러해서 이런 것일수도 있다’라고 자꾸 사례만 든다. 왜 도대체? 차라리 소설을 쓰지

계속 보면서 드는 생각은 실험적인 근거는 적은반면 이를 통해 내세우는 주장은 방대하다는 것이다. 그것에 따른 다른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즉 “A는 이러저러하다. 근거는 ·····. 이를 바탕으로 B가 C하는것은 물론 D를 했으리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A는 이를테면 암컷에 비해 수컷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수컷과 암컷이 비슷한 비율임을 설명하는 것(생물학적, 통계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 이후에 여러가지 가설들(메이나드 등등)은 근거가 없다. 동물들이 저런 생각을 해서 저럴 것이라는 근거가. 그렇게 생각하면 맞는것 같다.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또한 이기적인 유전자론에 맞지 않는 사례는 ‘오류’, ‘오작동’이라고 부르며 배제하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자신의 의견과 맞지 않는건 예외라고 하는 방식이 설득력이 충분하지 않다. 일반화되지 않더라도 학술적으로 통용되는건 통계학적으로 충분히 유의미한것인데, 자연선택설에서 살아남은 생존 유형을 단순히 오작동이라고 해도 되는것인가. 만약 가능하다면 자연선택설에서 오작동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p. 334

내기를 걸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때 나는 하나의 기본 원리에 돈을 걸 것이다. 바로 모든 생물은 자기 복제를 하는 실체의 생존율의 차이에 의해 진화한다는 원리이다.

meme
문화·의식은 번식력이 있다. 그럴까?

신에 대한 인식은 전염 감염과 같은 형태로 생겨났을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처음 인간은 패턴을 찾는 능력이 없었지만 유인원 어딘가에서 이것을 획득했고 이걸로 인해 생존률이 높아졌다. 지금의 인간은 자연 현상이나 별자리에서 패턴을 찾았는데 이것이 신이 있다고 가정한 첫걸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믿음을 가진 부족이 더 단합이 잘되고 생존률이 높아졌을 것이다.
즉 나는 인간이란 본디 무엇인가를 믿기를 좋아하거나, 어떤 결과에 원인이 있기를 추종하는 버릇이 있다고 본다. 신이란 개념이 전염을 통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의식’을 통제하기 위해 ‘믿는 것이 필요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생각이다.

p. 341

유전자는 장래의 유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사본 수를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표현할 경우, 실제의 의미는 “우리가 자연계에서 유전자가 나타내는 효과는, 장래의 유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수를 증가시키려고 행동할 것 같은 유전자다”라는 것을 뜻한다.

과연 그럴까? 진화론과 반대로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단 과일은 먹어치우기 때문에 단 과일은 멸종하고 번식되는 건 달지 않는 과일밖에 없다고 할때, 과일은 달지 않은 쪽으로 진화되어 왔다. 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경향성을 보인다고 할 때 그것을 마치 의도한것처럼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뭐 은유로써 그렇게 말 할 수 있다고 쳐도, ‘과일나무의 유전자가 맛좋은 과일과 맛없는 과일을 3:7로 열리게 할 경우가 접근하는 동물들의 수를 계산한 끝에 생존에 가장 유리한 숫자임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라는 것처럼 어이없는 전개같다.

p. 395

굶주린 동료에게 수혈해주는 흡혈박쥐 이야기

p. 407

날도래, 달팽이의 흡충 이야기
바이러스는 너무 치명적일 경우 숙주를 너무 빨리 전멸시키기 때문에 오히려 전염이 덜 된다. 그래서 오래 살아남는 바이러스는 덜 치명적이고 잠복기도 길어야 한다. 이를 두고, 바이러스는 덜 치명적이게 진화했다. 라고 할 수 있는가. 단지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살아남지 못했을 뿐이다. 이는 유전자에게 아무런 학습행위를 일으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즉 전혀 경향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