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앞부분을 읽고 있자면 우리가 시에서 감동을 받는 이유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전혀 다른 사람들은 우리 인간 개체들이 하나의 시에서 비슷한 인상과 감동을 받는다는것은 정녕 놀라운 일이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상상력이고, 이를 연구하는 학문이 상상력의 현상학이다.(인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대부분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서론부분이 특히 힘들어서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고, 그 이후인 1장 집, 2장 집과 세계는 그나마 조금 나았다. 다시 그 이후부터는 이해할수 없는 장의 연속들이어서 멍하니 글씨를 읽고 있지만 어느새 머리로는 다른생각을 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어온 책과는 많이 다르다는 느낌과, 이 책이 어떤맥락에서 시작했고 어느 지점인 것인가. 내가 어느 부분을 이해를 못하고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해야만 하는가.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던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 인식하지 못했던 내 독서의 한계를 넓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지식이 참 많다고 느꼈고, 작가가 전재한 – 독자들이 (당연하게도) 읽고, 알고,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한 부분이 상당해서 마치 나로서는 거대한 코끼리를 그린 그림을 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를테면 80년에 걸쳐 그려지고 있는 코끼리 그림의 넓적다리 부분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시작부터 지켜 본 사람들은 ‘이번 넓적다리는 참 조화로워’, ‘지난번 앞다리보다도 묘사를 잘했는걸’이라는 감탄을 쏟아낼 무렵, 나로서는 이 그림이 어떤 동물인지, 새인지, 돌을 묘사한건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더듬거리고 있는 지경이고, 마침내 넓적다리를 다 매만지고 나서야 아 이게 어떤 포유동물의 다리일지도 모르겠다. 하는 추측을 하게 된 것이다.
책의 제목에 많은 힌트가 들어있는 것 같다. 공간의 시학, 공간에 대한 시적 학문 정도의 느낌이랄까. 이 외에도 책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으로는 상상력의 현상학이 나오는데, 현상학이라는 것이 생소하기도 하고, 현상학과 대비하여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비판적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비평들을 보며, ‘아 현상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는 한 방법인가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참고. 후설의 현상학
예를 들어, 어떠한 물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을 우리의 의식을 통하여 인식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물체와의 관계를 맺게 되고 그 물체에 대해 인식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떠한 물체가 존재하는데,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음은 물론이며, 그 물체의 실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의식의 지향성’이라 하며, 후설 철학의 대표적인 개념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의식이 어떠한 지향성을 갖는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별’이라는 대상을 바라본다고 할 때, 그것을 과학적 탐구의 대상인 실체로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그것에 대한 시나 노래를 짓는 등의 예술적인 대상으로 받아들일 것이냐는 그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의 의식이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다르다. 이는 실증주의에서 실체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러한 의식의 가치판단과 같은 주관성을 부정한 것은 명백한 오류임을 보여준다고 후설은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실증주의가 철학의 목을 잘랐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설은 인간의 의식에서 드러나는 그 자체로의 ‘현상’을 서술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철학적 경향을 ‘현상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상학에 대해선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게 있다는 것 정도를 알게 된 것을 기념으로 여기며, 철학에 대해서 방금 눈 뜨기 시작한 나로선 내가 알고 있는 바닥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철학자라고 해봐야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중에서는 철학자가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알랭드 보통은 어떠한 현상에 대한 인물의 심리적, 사회적, 역사적 분석을 하는 경향이 있다면, 움베르트 에코는 인과관계에 초점을 맞추는(것처럼 보이고), 강신주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사회적 진실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가스통 바슐라르가 재밌다고 느낀 부분은 이것이다. 그는 이미지와 공간을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철학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가스통은 살고 있는 집의 형태와, 그 집과 관계맺는 나의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게 현상학의 요지가 아닌가 싶다. 나와 관계맺지 않는 사물은 존재한다고 볼 수 없고, 모든 사물은 나와의 관계, 내가 어떻게 인식되느냐에 따라 다르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어렵다.
이 책이 어려운 점중의 하나는, 나에게 생소한, 지금은 쓰지 않는 한자어가 너무 많이 쓰였다는 점. 문체를 보자면 일부러 어렵게 썼다기 보다는 당시의 번역습관정도가 아닐까 싶다. 지금본다면 충분히 우리 말로 더 쉽게 쓸 수 있을것 같아서 아쉽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현상학적 접근이 너무 이질적이라는 점. 프랑스 철학의 특징인지, 현상학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상상력을 (마치)과학적인 것처럼 접근한다는 점. ‘~하다’, ‘~인 것처럼’, ‘~인 것이다’라는 어미를 붙인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었고,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는 ~하게 된다’라는 표현을 볼 때마다 ‘나는 아닌데!!’라며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곤 했다.
또 하나의 어려운 지점은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시적인 접근을 한 것처럼 보이는데, 시를 어려워 하는 나로선 참 힘들었다. 시와 상상력이라는 것, 아직 나는 ‘시’라는 것은 해석하기 어려운 완결된 ‘문구들’처럼 보이고, 물론 그렇겠지만. 상당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가 접근하는 시읽기를 보자면 거기엔 보편적인 해석의 영역이 있는 것 같아서, 그런 이해가 선행된다면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드는 것이다.
또 한가지의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이라면, 상상력의 현상학, 공간의 시학이 다 좋다고 해도, 뭐랄까 시선이 편협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앞서도 다양한 철학자를 예로 들었지만, 저마다 철학자들은 각각의 세상을 보는 범위가 다른 것처럼 보인다.물론 그 정도에 따라 좋고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보기엔 이런 상상력의 현상학, 공간의 시학은 참으로 그 범위가 세밀해 보이는 것이다. 내 눈앞에 돋보기를 갖다 대는 느낌이랄까. 지금 같은 암울한 현실 – 개인의 안위, 행복보다도 생존이 어려운 현실 세계에서 이런 미시세계에 집착하는 듯한 느낌이 그리 공감가지 않는 시선의 영역처럼 느껴져 불편하게 느껴졌다.
마무리하자면, 나로서는 이 책이 완전히 이해가지 않았기 때문에, 좋고 나쁘고를 말할 수 없는 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읽어 온 독서와도 방향이 전혀 달랐고,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코끼리의 뒷다리처럼, 포유동물의 다리인가보다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징조라고 생각한다. 꽉 채워진줄 알았던 내 지도에 상당부분이 빈 공간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느낌이 나쁘지 않다. 몇시간을 이 책을 읽으며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과 싸웠는데, 그 고생에 비하면 결과는 일면 작아보여도, 오랜만에 책 읽는 체험을 한 느낌이다. 이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