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쩍 자주 듣게 되는 디자인을 둘러싼 디자이너의 자기혐오는 그리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닐지 모른다. 이는 비단 필립 스탁 같은 명사 디자이너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픽디자이너건 아니면 제품디자이너건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흔히 우울한 자조를 듣기 일쑤다. 어쩌면 그들은 언젠가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으며 사회개혁가로서의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희망에 잠시 부푼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지금 디자이너들이 현존하는 세계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소극적 정치를 일컫는 이름인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디자인 따위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심 뿌듯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업 디자이너가 된 그들은 비록 한 줌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디자인에 마련되었던 그 자부심이 사라졌다고 토로한다. 자신의 일에 대한 혐오와 경멸에 있어 디자이너를 능가하는 이들도 달리 없을 것이다. 전후 미국에서 발전한 디자인을 압축하는 말이 “비즈니스를 위한 디자인”이었고, 이것이 지배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며 디자인을 둘러싼 다양한 지역적 실천을 제거하고 모든 디자인 행위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바로 그런 담론을 대표하는 미국 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위의 유명한 표현처럼 디자인은 “위로 치솟아 올라가는 미려한 판매 곡선”을 위하여 복무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결국 지금 우리에게 디자인은 클라이언트를 위한 비굴한 부역에 불과하다는 푸념에 대해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라 물정모르고 디자인 동네에 뛰어든 자신을 책할 일이라고 대꾸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조금 잔인하고 냉소적이라면, 대중매체가 버젓이 말하듯이 디자인은 “돈 버는 감성”에 지나지 않으며 디자이너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시녀라고 자조하는 이들에게 디자인은 무고하다고 말하며 손사래를 쳐야 할지도 모른다. 디자인은 결백하며, 다만 디자인을 착취하고 경제적 가치를 획득하여 증식하기 위해 이름 남용하는 자본의 경제적 합리성이 문제일 뿐이라고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적 합리성 바깥에 놓인 디자인을 상상할 수 없다면, 지금 디자인과 경제 현실을 잇는 힘과 논리가 무엇인지 성찰하고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찾아보자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 디자인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上) 서동진

서동진씨는 예전에 디자인문화재단 오픈 행사때 찾아갔다가 우연히 강연으로 뵈었던 분이었는데, 이번에 출간된 ‘디자인플럭스 저널 01’에 그때 텍스트로 사용했던 내용이 수록되어 반갑기 그지 없다. 그때 만났던 서동진씨는 참으로 인상 깊었던 분이었다. 무엇보다도 본인을 디자인에 관심 갖는 사회학자라고 하시면서 디자인에 대한 너무나 해박한 지식과 조리있는 화술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쩌면 내가 무식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청중이 열명 남짓했던 강연에서 “공공디자인은 위험하다”라는 말에 디자인에 대한 핑크 빛 미래를 꿈꾸던 내게 참으로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 후로도 이 충격은 트라우마로 남아 깊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한편, 위의 내용과 같은 절절한 회의감에 실망도 많이 했었다.

책으로 출간된 디자인플럭스에서 다시 읽어보니, 예전에 보면서도 이해 가지 않았던 많은 구절들이 머릿속에 들어오더라.

과연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무엇일까. 이 답을 찾는 여행이 길어질거란 예감이 든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디자인이 단지 모양을 예쁘게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