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빌려본 일러스트레이션 책. 책 느낌도 좋고, 글도 산뜻하다.

단순함은, 명백한 것을 빼고 의미있는 것을 더하는 것이다. – 존 마에다 ‘단순함의 법칙’

확실히 우리의 일은 즐겁고, 그래서 때로는 멈추기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어떻게 멈추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웃음!

저의 경우 예술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책이나 그림, 음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어떻게 이 예술가가 나에 대해 이런 걸 알고 있을까?’하고 의아하게 여기는 때입니다. 작품이 놀랍도록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죠. 이것이 제가 예술가로서, 그리고 또한 예술의 소비자로서 좆는 스파크 입니다.

인상깊었던 그림들

Jon Mcnaught
Jonmcnaught.co.uk

Christoph Niemann
www.christophniemann.com

만능줄기세포라는 엄청난 무언가가 발견되었다길래 뭔가 했다. 만능줄기세포라는 단어는 그냥 한국 기자가 붙인 별명이라고.. 하지만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엄청난 발견이라고 한다. 아래 링크에 잘 설명되어 있어 재밌게 읽었다.

그제 읽던 논읽남 : 문 “그 일본츠자가 한것이 그리 대단한거냐?” 답 “넹.” – Secret Lab of a Mad Scientist

앱스토어에 출시된 수십만개의 앱들 대부분이 가치가 없는 이유는, 아이디어가 기발하지만 사실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중의 아주 소수 앱들만이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성공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무시하고 상상속에서 문제를 만들어내 SW로 해결합니다. 제프 베조스는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고 고통이 큰 문제 (싼 가격에 물건사서 빠르게 받는것)를 해결합니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트위터, 블로거, 미디움 세개의 서비스를 연속해 성공시킨 에반 윌리엄스는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중 하나를 골라, ‘기다리기 싫어함’, ‘생각하기 싫어함’ 두가지만 SW로 해결해주면 스타트업은 반드시 성공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SW의 성공은 고통의 정도가 큰 문제를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만드는 SW가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은 SW개발하는 과정 만큼이나 즐거운 일입니다.

Human-Computer Symbiosis

4년동안 혼자 제작했다는 SF물인데 정말 굉장하다!!
2편 제작을 위해 펀딩 받고 있다는데, 영상을 보면 그는 참 재미는 사람이로군 ㅎㅎㅎ 펀딩 성공되었으면 좋겠는데, 차라리 킥스타터에 올렸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드네. 바로가기

이럴수가 정말 대단하다.
이 영화는 자체로도 굉장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부분은 더 굉장하고, 그걸 일부러 감추었다는 것이 대단하다.

이 주 후에 난 극장에서 다시 관람할수 있다. 좋구나.

지난번에 갔던 삼청동의 푸른꽃에서 본 북악산이 생각나 무작정 삼청동에 갔는데, 푸른꽃은 오늘 열지 않는다더라. 아뿔사. 정처없이 걷다가 여기나 갈까 하고 들어간 곷이 Cafe Co였다. 카페 앞에 융드립한다고 씌여져 있어 융으로 하는 드립이 있구나 하고 들어갔는데, 의외로 커피맛이 너무 괜찮아서 기록을 해보았다.

Haara

추천받은 커피 하라는 첨 본 지명인데 에티오피아에 있는 한 도시라고 한다. 5일 전에 로스팅했다는 Haara의 첫 맛은 예가체프처럼 약한 신만으로 시작하고, 담백한 초콜릿 처럼 부드러움이 살짝. 커피 한 모금이 입안에서 목으로 넘기는 순간 가라앉는 듯한 진한 맛이 입안을 감돈다. 진하지만 쓰지 않은 커피 맛이 인상적이다.

카페인을 과다복용하면 심장이 피곤한 편이라 약하게 마시는 편인데, 이런 달콤한 진함은 인상적이었다. 별 네개!

과테말라

리필을 신청했더니 고장난 화장실에 대한 서비스로 과테말라를 주셨다고 한다.

이 전에 마신 하라와 비교되어 맛이 더 잘 구별이 되는 것 같다. 하라와 비교하면 상당히 연하고 순했는데, 첫만은 신맛이 하라보다 강했지만 전체적으론 연한 느낌이 강했다. 입안에서 머금으면 희석된 신맛이 입 전체에 퍼지고, 하라가 가라앉는 묵직한 맛 이라면 이 과테말라는 전체적으로 신맛이 입안을 감싸면서 구름속에 떠오른 흐릿한 달 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져버린다.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별 셋!

두 잔 다 7천원이었는데, 다음번엔 다른 맛을 위해 또 찾게 될 것 같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05년 작 Munich를 보았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벌어진 참사와 뒤이은 이스라엘의 복수극을 다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처럼, 복수극은 복수극을 낳는 증오의 악순환을 보여준다. 스필버그는 이를 최대한 객관에 가깝게 다루는게 목적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의 엔딩테마가 인상적이다. 얼핏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귀에 익은 멜로디가 비극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 섬세하게 다가온다.

철학자와 늑대를 드디어 다 읽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재밌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린 책. 초반엔 늑대와 개의 차이점에서 부터 시작해서 늑대와 사람의 차이에 관한 내용으로 옮겨가는데 인간이 보면 기분 나쁠만한 내용이지만 꽤나 재밌었던 부분이었다. 인간이 뭐 그리 잘났냐 라는게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정서이다.

후반부에 저자의 경쾌했던 태도가 암울해지며 세상을 향한 비관으로 가득한 클라이막스로 흐르는데, 늑대 브레닌의 죽음과 알콜중독 상태에서의 저술때문이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나 늑대 한 마리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동물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들지 않을까 싶다. 늑대란 개와는 달리 고상하고 멋있게 다가온다. 특히 저자가 묘사한 늑대와 함께 달리는 장면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늑대와 달려본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지구상의 인간이란 종족에 대해 고찰하게되며, 종국에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거나 회의감에 빠져버릴수도 있어 위험하기도 한)는 읽어볼 만한 책인듯 싶다.

인상깊던 구절들을 옮겨본다…. 근데 꽤 많아졌다.​

p.63 왜 오로지 인간만이 수천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고, 다른 생명은 생물학적 유산에 속박되고 자연의 역사에 종속되어 살아야만 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인간의 오만함이 아닌 무엇이란 말인가?

p.90 큰 뇌는 집단생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사회적 동물은 비사회적 동물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 한다. […] 바로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사회적 지능이 필요한 것이다.

p.142 인간은 스스로 악의 가능성을 조작하는 동물일 것이다. […] 영장류의 속임수와 계략은 자신보다 강한 영장류를 자신보다 약하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우리 안의 영장류는 언제나 다른 영장류를 야화시킬 가능성을 모색하다. 그리고 항상 악을 행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p.163 신은 마음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의 입장에 서 볼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지 못했기에 동정심이 없다. 신에 대한 가장 근접한 정의는 아마 반사회적 존재, 소시오패스 정도일 것이다.

p.167 홉스는 자신이 알고 있던 야생성, 즉 ‘자연상태’로부터 ‘문명상태’로의 전환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 계약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약받겠다는 뜻이다. […] 그것이 사회와 도덕성의 목적이며 존재의 근거이다.

p.170 계약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는 자는 문명의 범주에도 들지 못하며, 도덕의 범주에서도 벗어난다.

p.172 계약에서는 이미지가 전부이다. 계약 조건에 따른 희생을 하지 않고 보상을 얻을 수 있다면, 실제로 시간·노력·돈·안전을 희생하는 우둔한 상대방을 이용할 수 있다. 계약은 그 특성상 사기꾼에게 유리하다. […] 우리 영장류가 경멸하는 것은 어설픈 협장꾼들의 정교하지 못한 속임수일 뿐이며, 실제로는 속임수를 경멸하기는커녕 흥모한다.(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p.177 브레닌은 도덕적 수동자Moral patient이지 도덕적 행위자Moral agent가 아니었다. 브레닌은 자신이 한 행동이 뭔지 몰랐고, 그래서 잘못했다는 생각도 없었다.

p.179 롤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사회 구성의 가치를 어디에 둘지에 대한 정보를 모두 배제할 것을 주장했다. […] 나는 계약을 진정으로 공정하게 만들고 싶다면 인간이라는 사실과 이성조차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183 계약은 영장류가 서로의 관계를 통제하기 위해 개발한 장치라고 나는 생각한다.

p.185 너는 나를 보완해 주는가? 너와 있을 때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이고 잃는 것이 무엇인가? […] 계산이야말로 계약의 본질이자 영장류의 본질이다.

p.205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주장은 어떤 정부에게나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p.206 삶의 질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달려 있는 것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물 중독자가 아니다. 그러나 행복 중독자이다. 행복 중독자는 약물 중독자처럼 실질적인 도움을 주거나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는 것을 끊임없이 갈망한다.

p.207 스텔라 맥주를 진탕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는 즐거움은, 이제 품질 좋은 라투르 와인 한두 잔을 음미하며 느끼는 미묘한 전율로 격상된다.

p. 208 행복이 무엇이든 그엇은 감정이다. 영원토록, 부질없이, 감정을 추구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의 정의이다. 다른 동물은 감정을 좇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감정에 그토록 집착한다.

p. 218 내가 잘하는 것을 할 때, 그리고 동시에 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때 생겨났다. 이 기쁨은 말하자면 앎의 기쁨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p. 282 우리는 턱관절로 팽오쇼콜라를 씹고 있을 때 시간이라는 선위에 줄줄이 이어진 수많은 팽오쇼콜라들로 구성된 무수한 점들을 연상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라는 선의 앞뒤로 말이다. 우리는 그 순간 자체만을 즐길 수 없다. 우리 인간에게는 절대로 그 순간만의 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간은 끊임없이 앞으로 뒤로 유예되어 버리고 현재는 과거에 대한 기억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현재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현재의 순간은 유예되어 시간 속에 퍼져 있다. 순간은 비현실적이다. 순간은 항상 우리들을 피해 달아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삶의 의미는 절대로 순간에 있을 수 없다. […] 인간에게 순간만으로 완전한 그런 순간이란 없다. 인간의 모든 순간들은 불순물이 첨가되어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순간들은 혼탁해져 있다.

p.303 늑대는 매 순간을 그 자체의 보람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 영장류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인간에게 매 순간은 끝없이 유예된다.

p. 318 영장류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기준으로 자신이 평가한다. 하지만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소유의 사실이나 소유의 정도가 아니다.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늑대가 되느냐는 것이다.

SNS 서비스가 나오면 한 번씩 써본 것 같다. 그중에서도 싸이월드, 네이버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을 많이 썼는데 주기적으로 바꿔왔는데 싫증도 하나의 이유겠고, 내가 소유하지 않은 플랫폼이란 내 의도와 다르게 참 많이 바뀌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겠다. 좋은 쪽으로 개선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수익을 위해 산으로 가거나, 다른 곳에 팔려서 없어지거나, 팔리지 않아서 없어지기도 한다.

그런 것들을 보면 남이 만들어놓은 플랫폼에 내 아이덴티티를 구현한다는 것이 참 부질없고 가볍게 느껴진다. 그동안 나만의 블로그를 갖길 원해왔는데 마음먹으면 금방이라도 했을 일을 하지 못한 채로 벌써 수년이 흘러왔다. 요 한 달 동안 이름을 짓고, 도메인을 찾고, 글 쓰고 싶은 플랫폼을 찾아 테마를 바꾸고 나서야 드디어 ‘아 이거다.’ 한 게 바로 이 ‘0Q’다. 

글을 쓰기에 앞서 아득하고 편안한 분위기와 질 좋은 종이와 필기감 좋은 펜이 있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좋은 글이 나오는지는 다른 문제겠지만. 

이곳에 둥지를 틀면서 덮으려 하는 페이스북에 대해 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페이스북 참 좋은 플랫폼이다. 내 주위의 누구나 사용하고 심지어 수익도 많이 내고 있다. 모든 SNS가 꿈꾸는 정점에 올라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페이스북의 특징은 오픈과 연결이다. 사용하고 있으면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연결돼 있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은근 불편함이 있다. 펼쳐진 일기장 같은. 비교하자면 예전의 싸이월드는 닫힌 일기장이다. 누군가의 근황을 알려면 그의 공간에 꼭 들어가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관음증의 충족은 있어도 실시간성은 덜했다. 지금의 페이스북은 굳이 다른 이의 공간에 들어가지 않아도 사람들의 소식이 조간신문처럼 나에게 배달이 된다. 

왜 이래야 하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내가 다른 이의 소식을 보고받아야 하고, 내 이야기를 올리면서 좋아요가 한 개도 없으면 불안해지는가. 왜 그래야 하지. 연락이 쉽지 않던 친구를 페이스북에서 자주 보게 되면서, 최종적으로는 그 친구가 더는 생각나지 않게 되었다. 알고 있는 지식은 더 찾아볼 필요가 없듯이, 호기심이 사라진 대상에 대한 욕망은 내 관심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불교의 시선으로 보자면 하나의 욕망이 줄어든 것이니 열반을 원한다면 페이스북을 쓰자). 

지금 이 곳은 어떨까. 오픈된 일기장은 분명하겠지. 하지만 찾아오려면 꽤 불편할 거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올 일이 없을 것이다. 세상이 너무나 편리해지면서 불편함이란 어쩌면, 귀한 가치가 되는지 모르겠다. 내 블로그에 들어오는 게 불편했으면 좋겠다. 내 부끄러움도 덜할 것이고 댓글 달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엄청나게 고마워질 것이다. 

이 곳 역시 몇 년이나 가게 될지 궁금하지만, 내 집이려니 생각하고 가꾸어 보려고 한다. 페이스북은 얼마나 오래 지속이 될까. 아마 열어 놓은 것을 다시 닫기는 쉽지 않겠지만, 책 속에서 빠져나와 어떻게 될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Bye,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