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얼마나 작고 유한한 존재인가.

단 하나뿐인 우리의 삶은 얼마나 소중한지.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 이해가 안가거나 실망을 했는데,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모든 판단이 (전부는 아니겠지만)다른 이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번역을 담당한 홍영남 교수의 번역이 거의 쓰레기에 가까울 정도라서 ‘원서를 읽는게 차라리 쉽다’라거나, ‘내용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평이 많았는데, 나중에 개정판이 나왔지만 내가 본 책은 개정전에 출판된 원성이 자자한 판본이었다. 일단 아래 내용들은 그걸 몰랐을때 쓴거고. 지금도 개정판을 읽으면 이런 의견에 차이가 있을까 의심이 되긴 하지만, 나중에 개정판을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홍영남이라는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인걸까.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읽으며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그 사람의 번역에 비해 도킨스의 책은 너무나 쉽게 이해가 가게 쓰여졌다니, 읽기를 원하는 사람은 홍영남 교수가 번역하지 않은 책을 보거나, 원문을 보는 편이 좋을것 같다.

p. 100

노화에 관한 메더워의 이론
어떤 개체를 죽게 하는 유전자를 치사 유전자라고 할 때, 어렸을적 발현하는 유전자는 후대로 전해지기 어렵다. 반면 노년에 발현하는 유전자가 있다면 후대까지 이어오기가 쉽고 그런 경향성으로 많은 개체들이 생식 이후에 발현하는 치사 유전자를 폭 넓게 가졌다는 말이 설명이 된다.
“메더워가 강조하는 점은, 선택은 다른 치사 유전자의 작용을 늦춰 주는 효과를 가진 유전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좋은 유전자의 효과를 빠르게 하는 효과를 가진 유전자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진화의 많은 부분은 유전자 활동이 시작되는 시기에 유전적으로 제어된 변화로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특성이 모여 젊음과 늙음을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이론으로 부터 인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재밌는 것이 있다. 처음에 특정한 연령 이전에는 번식을 금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한계를 수백년에 걸쳐 점점 늘려나간다. 이런 방법을 이용하면 수명을 수백세까지 연장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비인간적이긴 하지만 말이 되는 방법이다.

p. 142

로렌츠는 그의 저서 ‘공격에 대하여’에서 동물의 싸움, 즉 ‘공격’은 무분별의 억제가 가능한 신사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동물의 싸움이 복싱이나 펜싱의 규칙처럼 규칙에 따라 싸우는 형식을 갖춘 시합이라는 것이다.
동물이 싸움에서 대체로 죽이지 않는 것은 경쟁자를 죽여도 뚜렸한 이득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는 싸울 것인가 싸우지 않을 것인가의 결단에 앞서 무의식적이더라도 복잡한 ‘손익계산’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보여준다.
메이나드 스미스는 ‘게임 이론’을 이용해서 이를 설명했는데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SS)라는 것이다. 이 ‘전략’이라는 것은 미리 만들어진 프로그램의 행동 방침’인데, 예로써 “상대를 공격하나, 그가 도망치면 쫓아가고, 응수해 오면 도망쳐라”이다. 일단 모든 개체가 이 전략을 (유전적으로) 사용한다면 자연 선택은 이 전략에서 이탈되는 행위를 벌할 것이다.

유전자의 작용을 파헤치는 이런 이론들을 보고 있자니, 참 길고 지난한 ‘역추적’과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북극해 근처에서 발견된 일본어가 적인 코카콜라 캔을 보고 이것이 어떻게 여기까지 도달했을지, 논리와 조건과 상상력을 발휘해서 역으로 유추해 보는 식으로 말이다. 북극과 일본은 차라리 가깝다. 그게 아무리 멀어보여도, 자연선택이라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우리가 볼수 있는 ‘남겨진 것’들 뿐인 단서들에게서 몇만 몇억년을 유추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과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p. 175

근친자-혈인자kin-가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이 평균보다 높다는 것을 보이기 쉽다. 이것이 어미의 새끼에 대한 이타주의가 흔한 이유일 것이라는 것은 오래 전에 밝혀진 사실이다.

도킨스는 전 장에서 ESS(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에 대한 가정을 전개시키며 ESS가 타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번 장에서도 유전자의 이타주의에 관해 논리 실험을 전개시켰는데 이는 전장과 비슷한 방식이지만 전혀 타당해보이지 않는다. 이타주의가 이런저런 식으로 이익을 줄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 다음 그렇다면 어떻게 개체들이 자신과 가까운 근친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인가. 이는 명백하게 순환오류로 보여진다. 그가 근친 유전자간의 이타주의를 밝히고자 했다면 동물에게서 근친관계에 따른 통계적 이기·이타주의적 행동을 비교했어야 옳다. 여기에서 보이는 실험적 단서가 단지 새끼에게 보이는 어미의 행동과 한배에 4마리를 출산하며 9마리의 무리를 이루는 아르마딜로 뿐이라는 것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근친에 대한 이타주의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개체의 지능에 의한 합리적인 판단이 아닌 유전자가 가진 성질이라고 볼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가. 원숭이가 양자를 키우는 행위를 단순히 규칙의 오용이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자신이 만든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는 오류라고 단정짓는 듯 보인다.

p. 267

이 자식은 이제 충분히 컷기 때문에 우리들 중 누구든 한쪽에서 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상대가 자식을 버리지 않을 것을 내가 확실할 수 있다면, 지금 버리는 것이 나에게는 이득이 될 것이다. 만일 내가 지금 떠난다면 나의 배우자는 자기의 유전자에 대해 최선의 수법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유전자가 살아남았을때 그 반대되는 행동이 생존에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과정들(이런 판단이 저런 판단보다 더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을 유전자 단위에서 한다는게 가능한 것인가. 그런 설명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 없이 결과를 가지고 유전자의 의도를 파악하는건 너무 억측같아 보이고 중반부-이기적인 유전자에 대한 사례들-는 너무 작위적이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

p. 270

이와 같이 수컷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많은 투자를 강요하고 있는 암컷이 만일 그렇게 하는 것 자체로 수컷의 버리는 행위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동물들이 이러한 고차원적인 가정법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관건이 아닐까. 이런 가정의 가정에선 아무런 실험적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10만년 뒤에 발견된 유골을 보고 상상할 수 있는 서사시와 다를게 뭔가. 단순히 결과를 가지고 동물의 전략을 유추해 낸다는게 가능한 것인가. ESS와 같은 전략이 있을수 있다란건 재미있는 생각이라고 생각하며 가능할수도 있다고 보지만 모든 상황에 끼워 맞을 수 있는 몇단계의 가정법을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전략이 있다고 해도 이것과 다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유추해낸 동물들의 전략이 우리 너무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으로 상상하는 것처럼 보여 설득력이 떨어진다. 나는 계속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실험적 근거’를 원하는데 여기선 자꾸 ‘암컷과 수컷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건 이런저러해서 이런 것일수도 있다’라고 자꾸 사례만 든다. 왜 도대체? 차라리 소설을 쓰지

계속 보면서 드는 생각은 실험적인 근거는 적은반면 이를 통해 내세우는 주장은 방대하다는 것이다. 그것에 따른 다른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즉 “A는 이러저러하다. 근거는 ·····. 이를 바탕으로 B가 C하는것은 물론 D를 했으리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A는 이를테면 암컷에 비해 수컷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수컷과 암컷이 비슷한 비율임을 설명하는 것(생물학적, 통계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 이후에 여러가지 가설들(메이나드 등등)은 근거가 없다. 동물들이 저런 생각을 해서 저럴 것이라는 근거가. 그렇게 생각하면 맞는것 같다.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또한 이기적인 유전자론에 맞지 않는 사례는 ‘오류’, ‘오작동’이라고 부르며 배제하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자신의 의견과 맞지 않는건 예외라고 하는 방식이 설득력이 충분하지 않다. 일반화되지 않더라도 학술적으로 통용되는건 통계학적으로 충분히 유의미한것인데, 자연선택설에서 살아남은 생존 유형을 단순히 오작동이라고 해도 되는것인가. 만약 가능하다면 자연선택설에서 오작동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p. 334

내기를 걸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때 나는 하나의 기본 원리에 돈을 걸 것이다. 바로 모든 생물은 자기 복제를 하는 실체의 생존율의 차이에 의해 진화한다는 원리이다.

meme
문화·의식은 번식력이 있다. 그럴까?

신에 대한 인식은 전염 감염과 같은 형태로 생겨났을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처음 인간은 패턴을 찾는 능력이 없었지만 유인원 어딘가에서 이것을 획득했고 이걸로 인해 생존률이 높아졌다. 지금의 인간은 자연 현상이나 별자리에서 패턴을 찾았는데 이것이 신이 있다고 가정한 첫걸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믿음을 가진 부족이 더 단합이 잘되고 생존률이 높아졌을 것이다.
즉 나는 인간이란 본디 무엇인가를 믿기를 좋아하거나, 어떤 결과에 원인이 있기를 추종하는 버릇이 있다고 본다. 신이란 개념이 전염을 통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의식’을 통제하기 위해 ‘믿는 것이 필요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생각이다.

p. 341

유전자는 장래의 유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사본 수를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표현할 경우, 실제의 의미는 “우리가 자연계에서 유전자가 나타내는 효과는, 장래의 유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수를 증가시키려고 행동할 것 같은 유전자다”라는 것을 뜻한다.

과연 그럴까? 진화론과 반대로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단 과일은 먹어치우기 때문에 단 과일은 멸종하고 번식되는 건 달지 않는 과일밖에 없다고 할때, 과일은 달지 않은 쪽으로 진화되어 왔다. 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경향성을 보인다고 할 때 그것을 마치 의도한것처럼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뭐 은유로써 그렇게 말 할 수 있다고 쳐도, ‘과일나무의 유전자가 맛좋은 과일과 맛없는 과일을 3:7로 열리게 할 경우가 접근하는 동물들의 수를 계산한 끝에 생존에 가장 유리한 숫자임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라는 것처럼 어이없는 전개같다.

p. 395

굶주린 동료에게 수혈해주는 흡혈박쥐 이야기

p. 407

날도래, 달팽이의 흡충 이야기
바이러스는 너무 치명적일 경우 숙주를 너무 빨리 전멸시키기 때문에 오히려 전염이 덜 된다. 그래서 오래 살아남는 바이러스는 덜 치명적이고 잠복기도 길어야 한다. 이를 두고, 바이러스는 덜 치명적이게 진화했다. 라고 할 수 있는가. 단지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살아남지 못했을 뿐이다. 이는 유전자에게 아무런 학습행위를 일으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즉 전혀 경향이 없는 것이다.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저이 있습니다. 어른들에게는 어린이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힘,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
어른이 되었지만, 슬프게도 우리에게 힘과 자유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힘과 자유는 사치라고 보일 정도입니다. 오히려 신경 써야 할 것, 눈치 보아야 할 것이 너무 많이 들어나 하루하루가 버겁기만 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진정한 어른이 되기 어렵다는 걸 절감하고 있는 지금, 지금은 깊을 밤입니다.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인간이 힘과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걸 긍정합니다. 
···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우리 정말로 진짜 어른이 되어 살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강신주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머리말 중에서

오늘 저녁 놀공발전소에서 주최하고 국립극장에서 열린 “Being Faust – Enter Mephisto”에 참여하고 돌아왔다. 간단히 소감을 적어보고자 한다.

(주의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무 긴 놀이 설명 : 게임이 알고보면 간단하지만 단계가 많고 복잡하여 설명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감이 있었는데 이부분은 이해하기 편하게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희미한 게임의 진행과 목표 : 처음에 욕망을 채우는 것이 이 게임의 목표라고 듣고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6개의 가치를 고르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facebook에 등록된 내 친구들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고 그 자금으로 욕망에 맞는 문장을 사게 한다. 문장을 가장 많이 얻은 사람이 승리자. 일단 이 프로세스 자체가 한번에 와닿지 않았다. 그저 이런식으로 해야 한다 라고 듣고 무작정 하게 되었는데, 게임을 진행하면서 나름은 ‘아 내가 선택한 가치가 게임의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걸까.’ 혹은 ‘내 친구를 파는 행위가 나중에 반전이 있지 않을까’등의 상상을 했지만 끝에 가서는 단순히 친구를 가장 많이 판 사람이나 욕망을 가장 많이 채운 사람이 승리하였다. 진행 과정에서 많은 파라미터들이 주제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단순히 게임의 노동을 위해 사용된 장치였다는게 게임이 끝나고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었다.

현금 교환 시스템 : 스마트폰에서 친구를 6명씩 facebook에서 불러와 친구들을 악마에게 팔아 현금화하는데, 자금이 떨어지면 다시 6명을 추가한다. 그 교환은 상점에 가서 꼭 해야하는데, 왜 친구를 한번에 많이 못바꾸게 했는지, 친구들은 왜 점점 값이 오르는지, 왜 친구에 중요도의 순위를 매기게 했는지가 밝혀지지 않았다. 중요한 친구가 비쌌을 뿐이다. 내 생각엔 사용하려 준비한 장치가 좀더 있었을 것 같은데 실현되지 않았던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중요한 것만 남기고 가지치기를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쉬운 가치 카드 시간 : 일정한 시간동안 다른 사람들과 카드를 바꿀수가 있는데 지금에서야 이해가 되는 것은 카드를 바꾸면 상대방이 모은 카드의 정답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건은 답을 안다고 해도 그 문제를 찾아야 하는데 백여개가 넘는 상자중에 해당 문제는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난 포기했다..

너무 단점만 늘어놓은 것 같다. 전체적으로 예전에 한번 해봤던 스피드데이팅 생각이났다. 전원이 빙고 종이를 들고다니며 칸에 적합할 것 같은 사람에게 물어봐서 맞으면 이름을 적어나가 빙고를 완성하는 게임이었다. 아주 창의적이고 재밌진 않았지만 빙고를 채우려면 거의 모든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단시간에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기에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싶었다. 이번 게임은 전체적으로 빙고 게임에 파우스트의 텍스트를 녹여내어 여러가지 장치들을 섞었다는 인상을 받지만 그 성분들이 그리 잘 섞였다는 느낌은 들지 못했다.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사를 읽으며 그 대사가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생각한다는 점에서 문학시간느낌도 나지만 게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런 지문들이 관객에게 와닿기엔 지나치게 점수 쌓기 게임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악마와의 거래를 부각시키고자 했다면 소중한것을 내주고 원하는 것을 얻게 하는 부분을 중심 테마로 삼았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파우스트 박사가 정말 소중한 것을 내어주었는가. 파우스트를 읽다보면 메피스토텔레스가 불쌍하고 파우스트는 절대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단점들을 늘어놓았지만 참신한 시도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단점들을 수용하여 발전해 일반인들이 두루 즐길수 있는 게임이 나왔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두번에 좋은 게임이 나올 수는 없다. 명작 보드게임이 나오기까지 수천 수만종의 보드게임이 그보다 몇십 몇백배의 사람들의 힘으로 탄생했을 것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시장을 개척한다는 점에서 놀공발전소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는 마당놀이를 하던 민족 아닌가. 좋은 시도과 선례를 만들어 수많은 게임이 창조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읽고 싶었던 퀀텀 유니버스를 이제야 읽게 되어 오랜만에 과학책을 정독했다. 양자역학에 대한 팟캐스트도 들어보고 책도 여러권을 들춰보았었는데, 깔금하게 납득되는 책들이 없어서 더욱 다른 책을 찾아 해멨었나보다. 이 책이라고 양자역학을 정말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책들과는 다른 접근과 나름 이해시키려 애쓰는 모습에 감동했다고나 할까. 그런 면에서 읽으면서 기분이 좋았던 책이다. 이해됬는지의 여부와는 전혀 별도로 말이다.

좋았던 점

이정도면 이해할수 있다며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단점

이해되지 않는다… 절반이상이 독자를 이해시키려는 시도이지만… 오히려 수식이나 다이어그램을 지나서 아 이건 이렇구나 하고 넘어가게 된다.

그럼에도 좋았던 점

양자역학이 어떻기 태어났고, 그것의 의의는 무엇이며 우리가 밝혀난 지점과 밝혀내지 못한 점. 양자역학의 대단한 점과 우리가 알고 있지만 원인을 모르는 지점이 어딘지 속 시원하게 밝혀 준다. 그런 면에서 솔직함이 다가오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상깊은, 기억하고 싶은 부분들

p. 87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빛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물체가 아니라 정보information에 적용되는 제한조건이다.
··· 입자 하나가 우주 반대편으로 순식간에 이동한다고 해서 입자와 관련된 정보까지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입자가 어느 방향까지 나아갈지 예측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 뭐냐;;;)

p. 89

(여기서 시계바늘은 전자가 발견될 확률을 표시하는 일종의 위상)
시계의 상태를 결정하는 법칙은 다음과 같다 – 미래의 시간 t에서 처음 위치로부터 x만큼 떨어진 곳의 시곗바늘은 반시계방향으로 x²에 비례하는 양만큼 돌아간다.
일상적인 말로 풀어쓰면 무거운 입자일 수록 많이 돌아가며, 원래 위치에서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많이 돌아가며, 시간이 많이 흐를수록 적게 돌아간다. 이것은 시계의 초기배열이 주어졌을 대 미래의 한 시점에서 이 시계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알고리듬이다.

p. 92

간단히 말해서 작용량action은 주어진 물리계의 특성을 좌우하는 양이다. 그런데 자연은 왜 근복적인 단계에서 이런 양을 선택했을까? 마땅히 떠올려야 할 질문이지만, 애석하게도 답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시계가 더도 덜도 아닌 mx²/t만큼 돌아가는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1669년에 작용량의 개념을 정립하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구체적인 응용과정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p. 132

파장이 짧아졌을 때 드브로이 방정식이 나타내는 변화를 분석하면 좀 더 깊은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 파장이 짧다는 것은 동일시간을 가리키는 시계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드브로이는 “짧은 파장은 큰 운동량에 대응된다”고 했다.

p. 214

이 책에서 지금까지 내린 결론 중 가장 신기하면서 이질적인 것 하나를 고른다면 나는 주저 없이 ‘입자들의 우주적 연결’을 꼽고 싶다. 우주에 존재하는 개개의 원자들이 다른 모든 원자와 연결되어 있다니, 이 세상의 모든 헛소리를 합쳐도 이보다 황당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에는 약 10⁸⁰개의 양성자가 존재하고 있으므로, 10⁸⁰개의 전자를 가두고 있는 우물형 퍼텐셜이 10⁸⁰개의 양성자에 의해 향을 받고 있는 셈이다. 어디선가 전자 하나의 에너지 준위가 바뀌면 다른 모든 전자는 그 사실을 즉각적으로 판단하여 “두 개 이상의 페르미온은 동일한 에너지 상태를 점유할 수 없다”는 배타원리에 위배되지 않는 쪽으로 변화를 시도한다.
전자들이 서로 상대방의 변화를 ‘즉각적으로 인지한다’는 주장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p. 258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는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이다. “

p. 273

“하나의 전자가 x에, 나머지 전자는 y에 도달하면서 광자가 관측자의 눈에 들어올 확률은 얼마인가?” 두 개의 전자가 각각 x, y에 도달하면서 도중에 방출된 광자 하나가 관측자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다이어그램을 찾아서 여기 해당하는 시계들을 모두 더한 후 최종시계의 크기를 제곱하면 된다. … 이런 경우에는 광자와 눈 사이의 상호작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모든 과정을 완벽하게 서술하려면 광자에 반응하는 관측자의 두뇌까지 계에 포함해야 하고, 두뇌를 이루는 모든 입자의 위치까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양자적 관측문제의 본질이다.

p. 278

그러나 놀라게도 과거로 가는 소립자는 물리법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디랙은 1928년에 이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p. 306

양자역학은, 현대문명의 일등공신인 트랜지스터에 응용되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이 세계를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배라보지 않았다면, 컴퓨터와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이기는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양자역학은 단순히 관측된 현상을 설명만 하는 이론이 아니다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과 특수상대성이론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반입자의 존재를 예견했고, 이 가상의 입자는 얼마 후 실험실에서 발견되었다 원자의 안정성을 좌우하는 입자의 스핀도 이론의 타당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입되었다가 흣날 물리적 실체로 판명되었다.

과학은 관측된 현상을 설명하고 아직 관측되지 않은 현상을 예견하면서, 우리의 삶을 돌이킬 수 없는 쪽으로 서서히 바꿔왔다. 이것은 과학과 그 외의 분야를 구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과학은 ‘자연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제아무리 뛰어난 석학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의외의 사실을 밝혀내는 막강한 도구이다. 과학은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이며, 과학이 찾은 진실이 초현실적이라면 그 초현실은 곧 진실이 된다. 이런 과학 분야에서 가장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이론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피상적으로) 강요받고 있다?
그렇다. 어쨌든 민주주의 해야 한다고 하고, 그러니 투표도 해야겠는데, 시민의 교육 수준은 높아서 차마 “동전 던지기”식 투표를 스스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왜? 쪽팔리니까. 그래서 ‘철학’과 ‘정책’이라는 제대로 된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고(그런 정보를 생산하지도 않으니까), 그저 막연한 이미지를 받아들인 뒤에 그 이미지를 ‘정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로 자신의 투표행위를 정당화하고, 스스로 핑계로 삼는다.
결국, 자존심 때문에 거부한 ‘동전 던지기’식 투표 행태와 다르지 않다. 먼 길을 돌아서 결국은 ‘동전 던지기’식으로 투표하고, 정치행위를 한다.
변화의 열망은 있지만 그릇이 없다
–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변화에 관한 열망이다. 사람들을 만나보면, 각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변화에 대한 열망은 아주 높은 편이다. 오히려 서구인들은 자신의 삶을 이미 결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라서 변화의 가능성과 폭이 아주 좁다. 우리는 그 변화에 관한 열망의 폭도 넓고, 전방위적이다.
하지만 그 열망이 너무 개개인에게 머물고 있다. 그걸 묶어주고, 사회화하는 매개들, 그릇이 없는 것 같다. 그 점이 몹시 아쉽다.

편지 쓰는 경제학자가 바라본 세상 – 이상헌 인터뷰

이 책의 앞부분을 읽고 있자면 우리가 시에서 감동을 받는 이유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전혀 다른 사람들은 우리 인간 개체들이 하나의 시에서 비슷한 인상과 감동을 받는다는것은 정녕 놀라운 일이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상상력이고, 이를 연구하는 학문이 상상력의 현상학이다.(인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대부분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서론부분이 특히 힘들어서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고, 그 이후인 1장 집, 2장 집과 세계는 그나마 조금 나았다. 다시 그 이후부터는 이해할수 없는 장의 연속들이어서 멍하니 글씨를 읽고 있지만 어느새 머리로는 다른생각을 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어온 책과는 많이 다르다는 느낌과, 이 책이 어떤맥락에서 시작했고 어느 지점인 것인가. 내가 어느 부분을 이해를 못하고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해야만 하는가.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던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 인식하지 못했던 내 독서의 한계를 넓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지식이 참 많다고 느꼈고, 작가가 전재한 – 독자들이 (당연하게도) 읽고, 알고,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한 부분이 상당해서 마치 나로서는 거대한 코끼리를 그린 그림을 보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를테면 80년에 걸쳐 그려지고 있는 코끼리 그림의 넓적다리 부분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시작부터 지켜 본 사람들은 ‘이번 넓적다리는 참 조화로워’, ‘지난번 앞다리보다도 묘사를 잘했는걸’이라는 감탄을 쏟아낼 무렵, 나로서는 이 그림이 어떤 동물인지, 새인지, 돌을 묘사한건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더듬거리고 있는 지경이고, 마침내 넓적다리를 다 매만지고 나서야 아 이게 어떤 포유동물의 다리일지도 모르겠다. 하는 추측을 하게 된 것이다.

책의 제목에 많은 힌트가 들어있는 것 같다. 공간의 시학, 공간에 대한 시적 학문 정도의 느낌이랄까. 이 외에도 책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으로는 상상력의 현상학이 나오는데, 현상학이라는 것이 생소하기도 하고, 현상학과 대비하여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비판적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비평들을 보며, ‘아 현상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심리를 분석하는 한 방법인가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참고. 후설의 현상학

예를 들어, 어떠한 물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을 우리의 의식을 통하여 인식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물체와의 관계를 맺게 되고 그 물체에 대해 인식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떠한 물체가 존재하는데,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음은 물론이며, 그 물체의 실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의식의 지향성’이라 하며, 후설 철학의 대표적인 개념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의식이 어떠한 지향성을 갖는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별’이라는 대상을 바라본다고 할 때, 그것을 과학적 탐구의 대상인 실체로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그것에 대한 시나 노래를 짓는 등의 예술적인 대상으로 받아들일 것이냐는 그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의 의식이 어떤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다르다. 이는 실증주의에서 실체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러한 의식의 가치판단과 같은 주관성을 부정한 것은 명백한 오류임을 보여준다고 후설은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실증주의가 철학의 목을 잘랐다”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설은 인간의 의식에서 드러나는 그 자체로의 ‘현상’을 서술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철학적 경향을 ‘현상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상학에 대해선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게 있다는 것 정도를 알게 된 것을 기념으로 여기며, 철학에 대해서 방금 눈 뜨기 시작한 나로선 내가 알고 있는 바닥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철학자라고 해봐야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중에서는 철학자가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알랭드 보통은 어떠한 현상에 대한 인물의 심리적, 사회적, 역사적 분석을 하는 경향이 있다면, 움베르트 에코는 인과관계에 초점을 맞추는(것처럼 보이고), 강신주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사회적 진실에 초점을 맞춘다.

내가 가스통 바슐라르가 재밌다고 느낀 부분은 이것이다. 그는 이미지와 공간을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철학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가스통은 살고 있는 집의 형태와, 그 집과 관계맺는 나의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게 현상학의 요지가 아닌가 싶다. 나와 관계맺지 않는 사물은 존재한다고 볼 수 없고, 모든 사물은 나와의 관계, 내가 어떻게 인식되느냐에 따라 다르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어렵다.

이 책이 어려운 점중의 하나는, 나에게 생소한, 지금은 쓰지 않는 한자어가 너무 많이 쓰였다는 점. 문체를 보자면 일부러 어렵게 썼다기 보다는 당시의 번역습관정도가 아닐까 싶다. 지금본다면 충분히 우리 말로 더 쉽게 쓸 수 있을것 같아서 아쉽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현상학적 접근이 너무 이질적이라는 점. 프랑스 철학의 특징인지, 현상학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상상력을 (마치)과학적인 것처럼 접근한다는 점. ‘~하다’, ‘~인 것처럼’, ‘~인 것이다’라는 어미를 붙인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었고,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는 ~하게 된다’라는 표현을 볼 때마다 ‘나는 아닌데!!’라며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곤 했다.

또 하나의 어려운 지점은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시적인 접근을 한 것처럼 보이는데, 시를 어려워 하는 나로선 참 힘들었다. 시와 상상력이라는 것, 아직 나는 ‘시’라는 것은 해석하기 어려운 완결된 ‘문구들’처럼 보이고, 물론 그렇겠지만. 상당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가 접근하는 시읽기를 보자면 거기엔 보편적인 해석의 영역이 있는 것 같아서, 그런 이해가 선행된다면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드는 것이다.

또 한가지의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이라면, 상상력의 현상학, 공간의 시학이 다 좋다고 해도, 뭐랄까 시선이 편협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앞서도 다양한 철학자를 예로 들었지만, 저마다 철학자들은 각각의 세상을 보는 범위가 다른 것처럼 보인다.물론 그 정도에 따라 좋고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보기엔 이런 상상력의 현상학, 공간의 시학은 참으로 그 범위가 세밀해 보이는 것이다. 내 눈앞에 돋보기를 갖다 대는 느낌이랄까. 지금 같은 암울한 현실 – 개인의 안위, 행복보다도 생존이 어려운 현실 세계에서 이런 미시세계에 집착하는 듯한 느낌이 그리 공감가지 않는 시선의 영역처럼 느껴져 불편하게 느껴졌다.

마무리하자면, 나로서는 이 책이 완전히 이해가지 않았기 때문에, 좋고 나쁘고를 말할 수 없는 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읽어 온 독서와도 방향이 전혀 달랐고,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코끼리의 뒷다리처럼, 포유동물의 다리인가보다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징조라고 생각한다. 꽉 채워진줄 알았던 내 지도에 상당부분이 빈 공간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느낌이 나쁘지 않다. 몇시간을 이 책을 읽으며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과 싸웠는데, 그 고생에 비하면 결과는 일면 작아보여도, 오랜만에 책 읽는 체험을 한 느낌이다. 이상 끝!

일주일…. 인줄 알았는데, 세어보니 10박 11일이었던 제주여행이 끝났다. 5일을 렌트카로, 나머지는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는데 날씨는 대체적으로 흐렸다가 가끔 맑은 하늘이 보이기도 했고, 7월이 가까워오면서 날이 맑아지며 해가 강해졌다.

토토로 게스트하우스
타시텔레 게스트하우스 ~ 갑선이 오름
단디해라 게스트하우스
스테이지 게스트하우스
제주도립미술관
타시텔레 게스트하우스
써니허니 게스트하우스 ~ 백약이 오름
사려니숲
아일랜드 게스트하우스 X 2
달파란 게스트하우스
계란후라이 게스트하우스 

누가보면 게스트 하우스 투어한줄…

위의 이미지는 Moves어플로 트래킹한 데이터를 Move-O-Scope으로 시각화 한 것. Moves는 아이폰 어플로 켜놓고 다니면 오늘 몇걸음을 걸었는지, 버스를 탔는지, 자전거를 감지하며 트래킹 해주는 어플인데 최근 Facebook에 인수되었다고 한다. 트래킹어플중에 심플하면서 성능이 괜찮아 많은 사람들이 애용중이며, 나도 몇달간은 항상 켜놓고 다닌다. 물론 배터리 소모가 있다. 여행시에는 보조배터리가 필수. Moves가 연동하는 서비스나 프로그램이 여럿있는데, 시각화를 쉽게 해주는 서비스가 없을까 하며 시도해보니 Move-O-Scope가 괜찮아 보였다.(http://quantifiedself.com/2014/03/map-moves-data 참고)

주황색 라인이 교통수단, 녹색이 걸어다닌곳, 흰 점들은 머무른 스팟들이며, 저 제주도 북쪽으로 비행기가 오고 나간 경로가 보인다. Moves가 엄청난 정확도를 보이진 않아서 (모드가 있지만 엄청난 배터리 광탈이 예상되서 안씀) 가끔 경로가 산과 들을 건너뛸때도 있는데 이번에 제주도에 매핑된 모습을 보니 그래도 대충은 맞는것 같다. 시간이 있다면 시간순서에 따른 경로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보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는거다.

지도를 대충 보자면, 처음에 렌터카가 있을 때에는 동쪽을 주로 다녔는데, 표선부터 성산을 많이 왔다갔다 한것 같다. 제화형의 요리에는 두번이나 갔고, 우측 하단에 해안에 있는 곳이 처음에 들른 토토로 게스트하우스, 남동쪽 중산간에 점이 여러번 찍힌 곳이 중산간에 위치한 타시텔레 게스트하우스, 성산 근처에는 스테이지 게스트하우스, 단디해라 게스트하우스, 성산 시내 등등. 그리고 제주시에 차를 반납하면서 제주도립미술관을 찍고, 다시 성산에 와서 타시텔레 게스트하우스를 또 가고 그다음엔 동쪽 산간에 위치한 써니허니 게스트하우스를 갔다가 사려니숲을 찍고 다시 제주터미널에 가서 남서쪽 모슬포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아일랜드 게스트하우스에서 2박, 그리고 일주도로를 타고 달파란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서귀포 시내로 와서 올레길 7코스를 걸음. 그리고 다시 달파란 게스트하우스. 동일주노선을 타고 월정리에 있는 계란후라이 게스트하우스.

뭐 이렇게 복잡하게 다녔는가 나는.

오랜만에 한 예술잡지를 샀다. 가끔 서점에서 들춰보던 예술잡지였는데 이제보니 경향에서 낸 잡지였고, 내용에 호기심이 가서 한번 사 보았다. 그 맨 처음에 편집자의 사설을 읽다 속이 터져버렸다.

이 속터짐은 너무도 다른 비교 때문이다. 평소라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 법했을텐데, 그 비교 상대는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이다. 하루키이기도 하고 어쩌면 일본 특유의 말투이기도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내 느낌일 뿐이고, 내가 수많은 일본 글을 읽고 통계 내 본것이 아니니 확신은 없다.

그 발단은 며칠전에 사 본 하루키의 잡문집이었는데, 그동안의 매체에 기고한 길고 짧은 글들을 모아 ‘잡문집’이라 하여 낸 책이다. 자신의 글을 ‘잡문’이라 하다니 과연 그답다. 하루키의 글 뿐만이 아니라 일본인의 글에서 비슷하게 풍기는 인상이 있다. 가볍다, 날카롭다. 짧지만 핵심을 짚는다. 무거울라 치는 찰라에 슬쩍 발을 빼거나 딴청을 피운다. 자기 조롱에서 문장의 분위기를 가볍게 띄우는가 하면 긴 창을 들고 달려나와 훅 찌르듯 핵심을 파고든다. 일본의 문장은 그런 맛이 있다. 역시나, 하루키의 글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했다면 그냥 그려려니 하고 넘어갔을텐데, 오늘 읽은 사설이 방점을 찍는다. 이건 일본과 한국의 문장 스타일의 상대성을 논하기 이전에 너무 못썼다. 글을 읽으라고 썼나 싶으며 종국에는 ‘이걸 뭐하러 쓴거야’라는 감상을 남긴다. 예를 들면 이렇다.

‘··· 우리네 예술가들의 현실에서도 그처럼 의결한 삶이 가능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도 스친다. 그런데 엄연히 존재하는 실상과 견줘 보면 그건 단지 하나의 이상에 머문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에선 실현 불가능한, 사고의 범주에서나 이륙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있는 탓이다. (중략)’

‘즉, 작가들이 아무 돈 걱정 없이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으면 좋겠다가 “돈이 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거나 “전념했으면 좋겠다”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림들이, 그 모든 예술작품들과 예술가들이 문화적 관점에서 인류에게 얼마나만큼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확답은 언제까지든 유효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끝)’

이게 말이야 방구야. 요새 이런 글들을 많이 본다. 자신의 속내를 숨기면서 고상한 척하고자 하는 고귀한 영혼들의 말돌리기들, 신문에서-정당 대변인에서-대학의 학생 리포트에서,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는 그 제스춰 취하는 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속터지기가 그지 없는 것이다. 이 지리멸렬하고 맺음없는 단어들을 보고 있자니 자기가 받은 폭탄을 재빨리 옆사람에게 한없이 돌리고 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우리 말에는 색과 맛이 다른 재료 들이 많다. 일본 글에서 볼 수 없는 복잡 미묘한 단어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쓰임은 죄악이다. 차라리 제목만 덩그러니 써서 내용을 상상하게 하는 편이 더 낫겠다. 한페이지 넘겼을 뿐인데 이러면 나머지 장들을 어쩌라고,

“탱고는 실수할게 없어요. 인생과 달리 단순하죠. 탱고는 정말 멋진 거예요. 만일 실수를 하면 스탭이 엉키고 그게 바로 탱고죠.”

미루고 미루다 보게됬는데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보통 여인의 향기는 저장면이 많이 나와서 당연히 여성과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는 생각보다 상당히 달랐다! 상상은 로마의 휴일같은 분위기였는데 ‘죽인 시인의 사회’에 더 가까운? 그래도 탱고장면은 너무 멋졌다. 꼭 한번 배워보고 싶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