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때부터 꿈꿔왔던 이야기. 만화나 영화에서 보던 매력적인 이야기.
현재 인류는 광자를 이동시켰고, 몇년안에 분자를 이동시킬수 있을꺼라고 한다. 그리고 10년안에는 세균같은 다세포생물을, 아니 좀더 빨라질수도 있을것이다.
순간이동이라는게 아주 꿈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 우린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만약 내가 이동된다면, 과연 거기있는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가, 나는 죽고 새로 생겨나는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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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파란색인 이유는
태양광선이 대기에 부딪혀 산란해서 가시광선중에 파란색만이 보이기 때문이지.
내가 말하고 싶은건 그것보다 태양이 노란색인 이유에 대해서야
별은 표면온도에 따라 각기 다른 빛을 갖는데
붉은색 3500도
주황색 5000도
노란색 6000도
황백색 7000도
흰색 10000도
청백색 25000도
푸른색 50000도
굉장하지않아
내가 고등학교에선가 이걸 처음 들었을땐, 굉장히 놀라웠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태양이, 우리 태양계에서만 이런 색이라는거
그럼 어딘가에는 흰색태양, 파란색 태양, 주황색태양이 있다는말
와우
푸른색 태양은 어떨까 흰색 태양은
아마 태양빛이 지금과 틀렸다면
이제까지의 미술의 역사가 완전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네.
재밌겠다
#진정 멋진 하늘색이란 말야
초저녁 언저리. 하늘이 어두어 지기 직전.
파란색에서 검은색으로 바뀌는 찰라의 순간
하늘이 검은색으로 물들이 한시간 정도 전의 하늘은
해가 지는 쪽의 산에서 빛이 새어나와 흰색과 약간 짙은 파랑이 어우러진.
그것도 뭐 나름대로 그다지 나쁘다고 할 수 는 없지만,
그런 색이 유지되다가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순간이 있어.
파란색에서 검은색의 경계에 있는,
시간으로 따지면 5~9초정도의 정말 순간이랄까.
그 색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우와! 하는 탄성이 절로나올만큼 예쁘지
아름답다. 라고 생각한 순간 하늘은 돌연 검은색이 너무진해져
탁해져버리는거야
해가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가버리는 순간 –
이란것을 정의할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 해는 무지무지하게 크니까
– 의 하늘색이라도 해두자.
어쨋든. 눈물이 날만큼 아름다워 한숨이 나오곤해
서른이 되기 조금 전에 아무랜 맥락도 없이 문득 ‘소설을 쓰자’는 생각이 들어 쓴 것이 공교롭게 한 문예지의 신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내게는 습작이라는 것이 없다. 처음 쓴 것부터 전부 그대로 ‘상품’이 되었다. 그때는 뭐,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마음 편하게 받아들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뻔뻔스러운 일이다. 흠흠, 이건 내 자랑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사실을 쓰고 있을 뿐이다.
나는 ‘수상이 결정되었습니다’하는 연락을 받고 출판사에 가서 담당자를 만났다. 그리고 출판부장(인지 누군지)에게 가서 인사를 했다. 보통의 의례적인 인사이다. 그랬더니, ‘당신 소설에는 상당히 문제가 있지만, 뭐, 열심히 해 보세요.’라고 말했다. 마치 실수로 입에 넣은 것을 퉤 하고 뱉어내는 듯한 어조였다. 이 녀석, 부장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잘난 척 말할 것까진 없잖아 하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어째서 그런 말을 들었을까? 내가 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라는 소설이 상담히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출판사 내부에서도 ‘이런 소설은 문학이 아니다’하는 소리가 있었다. 그야 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마지못해 상을 준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주는 상이라면, 겉으로만이라도 좋은 얼굴 좀 하면 어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혼자 정원 의자에 앉아 뒤돌아 보니, 나라는 인간에게도, 내가 쓴 소설에도 상당히 문제가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있는) 것은 확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상당히 문제가 있는 인간이 상당히 문제가 있는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선가 뒤에서 손가락질을 받아도 어쩔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얼마쯤 마음이 편해진다. 인격과 작품에 대해서 아무리 비난을 받아도, ‘미안합니다. 원래 상당히 문제가 있어서요.’하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적절한 예일지도 모르겠지만, 태풍과 지진이 모두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할 수 없잖아. 어차피 그게 태풍(지진)인걸.’하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얼마전에 독일의 한 신문사에서 편지가 왔다. 인기 있는 텔레비전 공개 문예 비평 프로그램에서 독일어로 번역된 나의 책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이 다뤄졌는데, 레플러 여사라는 고명한 문예 비평가가, ‘이런 것은 이 프로에서 추방해 버려야 한다. 이것은 문학이 아니다. 문학적 패스트푸드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거기에 대해서 여든이나 되는 사회자가 일어나서 나를 뜨겁게 변호했다(해 주었다). 결국 레플러 여사는 화가 나서, 흥, 이런 불쾌한 프로그램에는 절대로 출연하지 않겠다고, 12년 동안 출연했던 레귤러 패널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 문제를 무라카미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의 편지였다. ‘그러니까, 원래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요, 정말로.’ 하고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고해 주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요즘 블로그가 참으로 심심해지고 있어서, 참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의 글을 무단으로 도용합니다.
한국문학과 일본문학의 차이는 분명이 존재하고 있고 고유의 스타일이 있지만,
이런글은 단 한사람밖에 쓰지 못한다는거,.
어쩌면 유희열이 글을쓰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적의 나는 죽음과 꽤나 친숙했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였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6~7살 무렵부터, 학교를 들어가고서도 한동안은, 죽음을 꽤나 심각하게 생각해왔다.
사람은 왜 죽는걸까.
싯다르타도 이 문제로 고민하다 궁궐생활을 박차고 출가했다고 한다.
어렸을때부터 호기심 충만한녀석이었던 나는, 심심풀이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해온것 같다.
거의 하루에 서너번씩 꾸준히 생각해왔지만, 좀처럼 발전하는것도 없었고, 새로운 사실도 없었다.
사실 거기엔 커다란 벽이 있었다.
죽는다.
죽으면 어떻게되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사후세계로 가게될까.
염라대왕에게로 가는가 하느님에게로 가는가,
우린 환생할수 있을까.
그중의 아무것도 나에게 설득력이 없었기에,(난 여지껏 무교다)
죽으면 소멸한다고 생각해온것 같다.
소멸,
소멸이란 어떤것일까.
나가 죽는다면, 남은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알수없었다.
내가 죽고나면, 세계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는거니까
이 뭐든게, 팟 하고 꺼지는게 아닐까.
내가 없는 세계따위 나에겐 아무 의미도 없잖아.
천국에 가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일까.
내가 죽는다
집이 사라지고
우리나라, 세계, 지구가 사라지고,
별이 사라지고
우주가 사라진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마져 사라진다.
이대목에 이르러, 머리속에서 아찔한 느낌이 드면서 휘청 하는데,
뭐랄까, 이 느낌을 즐겼던것 같다.
아마도, 어린 머리로, 모든것의 소멸이란 감당하기 어려운 깨달음이었기에,
그후에도 종종 그렇게,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곤 했다.
그뒤에는 학교에 가서 다른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을 돌려 그런 상상은 자연스럽게 그만두었던것
같은데,
왜일까, 왜 그때 난 죽음에 그토록 열중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