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갔던 삼청동의 푸른꽃에서 본 북악산이 생각나 무작정 삼청동에 갔는데, 푸른꽃은 오늘 열지 않는다더라. 아뿔사. 정처없이 걷다가 여기나 갈까 하고 들어간 곷이 Cafe Co였다. 카페 앞에 융드립한다고 씌여져 있어 융으로 하는 드립이 있구나 하고 들어갔는데, 의외로 커피맛이 너무 괜찮아서 기록을 해보았다.

Haara

추천받은 커피 하라는 첨 본 지명인데 에티오피아에 있는 한 도시라고 한다. 5일 전에 로스팅했다는 Haara의 첫 맛은 예가체프처럼 약한 신만으로 시작하고, 담백한 초콜릿 처럼 부드러움이 살짝. 커피 한 모금이 입안에서 목으로 넘기는 순간 가라앉는 듯한 진한 맛이 입안을 감돈다. 진하지만 쓰지 않은 커피 맛이 인상적이다.

카페인을 과다복용하면 심장이 피곤한 편이라 약하게 마시는 편인데, 이런 달콤한 진함은 인상적이었다. 별 네개!

과테말라

리필을 신청했더니 고장난 화장실에 대한 서비스로 과테말라를 주셨다고 한다.

이 전에 마신 하라와 비교되어 맛이 더 잘 구별이 되는 것 같다. 하라와 비교하면 상당히 연하고 순했는데, 첫만은 신맛이 하라보다 강했지만 전체적으론 연한 느낌이 강했다. 입안에서 머금으면 희석된 신맛이 입 전체에 퍼지고, 하라가 가라앉는 묵직한 맛 이라면 이 과테말라는 전체적으로 신맛이 입안을 감싸면서 구름속에 떠오른 흐릿한 달 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져버린다.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별 셋!

두 잔 다 7천원이었는데, 다음번엔 다른 맛을 위해 또 찾게 될 것 같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05년 작 Munich를 보았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벌어진 참사와 뒤이은 이스라엘의 복수극을 다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처럼, 복수극은 복수극을 낳는 증오의 악순환을 보여준다. 스필버그는 이를 최대한 객관에 가깝게 다루는게 목적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의 엔딩테마가 인상적이다. 얼핏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 귀에 익은 멜로디가 비극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 섬세하게 다가온다.

SNS 서비스가 나오면 한 번씩 써본 것 같다. 그중에서도 싸이월드, 네이버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을 많이 썼는데 주기적으로 바꿔왔는데 싫증도 하나의 이유겠고, 내가 소유하지 않은 플랫폼이란 내 의도와 다르게 참 많이 바뀌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겠다. 좋은 쪽으로 개선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수익을 위해 산으로 가거나, 다른 곳에 팔려서 없어지거나, 팔리지 않아서 없어지기도 한다.

그런 것들을 보면 남이 만들어놓은 플랫폼에 내 아이덴티티를 구현한다는 것이 참 부질없고 가볍게 느껴진다. 그동안 나만의 블로그를 갖길 원해왔는데 마음먹으면 금방이라도 했을 일을 하지 못한 채로 벌써 수년이 흘러왔다. 요 한 달 동안 이름을 짓고, 도메인을 찾고, 글 쓰고 싶은 플랫폼을 찾아 테마를 바꾸고 나서야 드디어 ‘아 이거다.’ 한 게 바로 이 ‘0Q’다. 

글을 쓰기에 앞서 아득하고 편안한 분위기와 질 좋은 종이와 필기감 좋은 펜이 있어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좋은 글이 나오는지는 다른 문제겠지만. 

이곳에 둥지를 틀면서 덮으려 하는 페이스북에 대해 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페이스북 참 좋은 플랫폼이다. 내 주위의 누구나 사용하고 심지어 수익도 많이 내고 있다. 모든 SNS가 꿈꾸는 정점에 올라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페이스북의 특징은 오픈과 연결이다. 사용하고 있으면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이 모두 연결돼 있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은근 불편함이 있다. 펼쳐진 일기장 같은. 비교하자면 예전의 싸이월드는 닫힌 일기장이다. 누군가의 근황을 알려면 그의 공간에 꼭 들어가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관음증의 충족은 있어도 실시간성은 덜했다. 지금의 페이스북은 굳이 다른 이의 공간에 들어가지 않아도 사람들의 소식이 조간신문처럼 나에게 배달이 된다. 

왜 이래야 하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내가 다른 이의 소식을 보고받아야 하고, 내 이야기를 올리면서 좋아요가 한 개도 없으면 불안해지는가. 왜 그래야 하지. 연락이 쉽지 않던 친구를 페이스북에서 자주 보게 되면서, 최종적으로는 그 친구가 더는 생각나지 않게 되었다. 알고 있는 지식은 더 찾아볼 필요가 없듯이, 호기심이 사라진 대상에 대한 욕망은 내 관심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불교의 시선으로 보자면 하나의 욕망이 줄어든 것이니 열반을 원한다면 페이스북을 쓰자). 

지금 이 곳은 어떨까. 오픈된 일기장은 분명하겠지. 하지만 찾아오려면 꽤 불편할 거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올 일이 없을 것이다. 세상이 너무나 편리해지면서 불편함이란 어쩌면, 귀한 가치가 되는지 모르겠다. 내 블로그에 들어오는 게 불편했으면 좋겠다. 내 부끄러움도 덜할 것이고 댓글 달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엄청나게 고마워질 것이다. 

이 곳 역시 몇 년이나 가게 될지 궁금하지만, 내 집이려니 생각하고 가꾸어 보려고 한다. 페이스북은 얼마나 오래 지속이 될까. 아마 열어 놓은 것을 다시 닫기는 쉽지 않겠지만, 책 속에서 빠져나와 어떻게 될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Bye, Facebook.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면 당신은 인생에서 하루도 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약속의 따뜻함에 들떠서 굴복하기 전에, 딴지를 걸어보자. “일을 마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서 정확히 누가 이득을 보는건가?” “왜 일하는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도 일 하지 않는것처럼 느껴야 하는가?” 그 말이 힘을 실어주는 노동의 착취 메커니즘을 숨기는 동안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말은 사실 자본주의의 가장 완벽한 이데올로기적 도구가 됐다.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주문의 허구 중에서

너무나 당연한 말 같은 주문. 그 말은 결국 우리가 하는 일을 사랑하라는 말이겠지.

요즘들어 집 근처에 자주가는 카페가 있다.
적당히 사람이 없고, 조용하고 전체적인 조명이 따뜻한 파스텔톤이라 마음이 편하다. 창밖을 향해 앉아 있다보면 유리문 바깥에 고양이가 얼쩡거릴때가 있다. 흰 털에 새까만 얼룩을 엎지른듯한 냥이는 꼭 유리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털손질을 하거나 길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문 바로 옆이라 다른 고양이들 처럼 들어올 법도 한데 들어오지 않고 선을 지킨다. 이 가게의 방침인지 그 고양이의 방침인지는 알 수 없지만 ‘너는 손님, 나는 고양이’ 같은 당당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도 시야안에서 얼쩡대길래 그려보았다. 몸통은 그리기 쉬우나 고개가 너무나 빠르게 움직여 머리와 손을 그리기가 힘들었다. 이쪽손 저쪽손 핥으랴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신경쓰라, 지나가는 사람 쫒으랴. 고양이는 정말 예민한 동물이구나 싶다. 오랜만에 연필로 그려봐서 그런지 재밌다. 역시 그리기에는 살아 움직이는게 좋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얼굴이던 몸이건, 그리기가 쉬우면서 쉽지않고, 재밌다.

저녁을 먹고 한참 컴퓨터를 하다 엇그제 따놓았던 와인이 생각나 한잔 마셨다.
아마 만원이 좀 안되게 이마트에서 사왔던것 같은데, 달달해 보이는 라벨의 아르헨티나산 와인이다. 하얗고 불은 색의 라벨이 너무 지나치게 싶을 정도로 달것만 같은 느낌을 주고 있는데, 집에와서는 이걸 왜골랐지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맛은 괜찮았다. 와인맛을 평가할정도로 많이 마셔보질 않아서 표현이 정확할지는 모르겠으나마는, 첫맛은 적당히 달아 목을 넘기며 지나치지 않은 쓴맛이 달콤하게 넘어간다. 말하자면 진한 붉은색 같은 단맛이라고 할까. 단맛이 입안에 남지않고 깔끔하게 사라져 나쁘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제품명은 뜨리벤또 스위트 말백. 12%의 도수다. 뚜껑은 당연히 코르크겠지 했는데 돌려따는 알루미늄 마개로 되어있어 간편하게 열고 닫을수 있다. 그리고 이틀 지났는데도 맛있네. 내 입이 둔한건지. 반 정도 남은 와인을 오늘 다 마시게 될것 같다. 이 와인을 기준삼아 다른 레드와인을 맛보면 재밌을듯… 하지만 내 미각의 기억력은 너무나 나빠서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군.

김영호
Kim Yeongho

환경이 변하고 있다.

6달 전에 이곳에 이사와 처음에 어수선했던 집안이 이젠 많이 정리가 되었다. 처음엔 뾰족한 곳을 밟기도 하고 팔이나 어깨로 벽에 부딫히기도 하고 뭘 차서 넘어뜨리기도 했는데, 이제는 몸이 집을 기억하는지 익숙해 지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여름엔 무더워 고생한 기억이 희미해져 지금은 창문을 자주 열진 못하지만 가끔 낮에 잠깐식 은은하게 방 안을 채우는 햇살이 참 반갑다.

3달 전부터 시작한 운동은 많은 걸 바꾸었다. 하체운동을 하고 계단을 벌벌 떨면서 내려간 적도 있었는데 이젠 제대로 운동한 후의 뻐근한 느낌이 참 좋다. 제주도 여행하면서 운동효과를 가장 많이 느꼈는데, 하루종일 걷거나 산을 올라도 힘이 넘치는 느낌, 육체 활동 후의 내가 몸을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나를 가장 만족스럽게 만든다. 시작은 정말 미약하고 이러다 죽는게 아닐까 싶었지만 시작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두달이 넘어가는 식단조절은 허리를 1인치 줄어들게 했는데 그외 시각적인 변화는 많지 않아 아쉽다. 닭가슴살이 점점 질려가고 있어 새로운 조리법을 찾아보려 하지만 별다른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게 나를 가장 무섭게 만들고 있다.

2개월 전 부터는 직장을 그만두고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근 10년동안 나를 지배해 왔던 생활패턴 – 출근이나 공부를 벗어나 목적이 없는 삶으로 일탈하고 나니 뭐랄까… 네비게이션 없이 도로를 이탈해버린 느낌도 들지만 은근히 재밌는게 이러다 영영 도로로 돌아가지 못하는게 아닌가 하는 위험한 느낌 역시 즐기는 중이다.

시간이 많아졌지만 의외로 더 빨리 흘러가고, 생각이 많아지는데 이를 줄이고 행동을 많이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블로그를 열면서 네이버 블로그를 어떻게 할지 생각을 전혀 못했다. 네이버 블로그에 가져오는 기능이 있나 하고 찾아보니, 그동안 쓴 글들을 예쁜 포맷의 PDF로 만들어 주는 기능이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놈들같으니…

어차피 모두 다 옮겨오려고 하지 않았으니 몇개씩 손으로 옮겨와야 할 것 같다. 이제야 네이버 블로그를 떠날 이유가 분명해졌네. 좀 늦긴 했지만.

오후에 변두리 어느 집의 열린 문틈으로 작은 탄피가 떨어져 수족관에 있던 작은 물고기 두 마리가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전용으로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다. 밤새도록 성당의 검은 관대 옆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관대 위, 관 속에는 은색 물고기 두 마리가 놓여 있었는데, 심연만큼이나 깊은 검은 상자 안에 놓여 있는 그것들을 보려면 한참은 몸을 숙여야 했다. 나중에는 영구차에 달린 말 여섯맘리가 별 힘들이지 않고 이따금씩 그것을 싣고 다녔다. 장례식 담당자는 도시의 공공선을 위해서 그들의 숭고하고 고귀한 발자국이 필요하다고 말들을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때 마부가 말들의 콧구멍을 살짝 쳤고, 정작 효과를 발휘한 건 그거였다. 장례식에서 주교는 무덤 위에 서서 열의에 찬 설교를 했지만, 실수로 자기 장백의를 밟는 바람에 아래로 떨어졌다. 모두 집중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갑자기 사라진 걸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실수로 그에게 흙을 뿌렷다. 그는 결국 다시 끌어 올려졌고, 묘지기들은 사과를 해야 했다. 그는 정말 기분이 언짢았다. 하지만 그 장례식 이후에 적군에 대한 반감이 전반적으로 눈에 띄게 높아졌다.

-‘포위된 도시의 연대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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