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times I’d wake up at two or three in the morning and not be able to fall asleep again. I’d get out of bed, go to the kitchen, and pour myself a whiskey. Glass in hand, I’d look down at the darkened cemetery across the way and the headlights of the cars on the road. The moments of time linking night and dawn were long and dark. If I could cry, it might make things easier. But what would I cry over? Who would I cry for? I was too self-centered to cry for other people, too old to cry for myself.” — South of the Border, West of the Sun by Haruki Murakami.

사카모토상이 늙었다
뭐라 얘기하는데, 크리스마스 인사인가. 알아듣는 단어는 단지 그것뿐.
그를 알게 된 지 10년이 넘었다. 전반부는 음악에 미쳐, 지금은 그의 글과 얼굴만 봐도 좋다.
늙어간다. 그 역시 사람이구나.
머리도 희끗한것 같고.
그가 죽는다면 아아, 안타깝고 슬프겠지만, 왠지 안심이 된다.
늙는다는 것에 대해. 바스러져 가는, 시간의 풍화작용을 헤치고 있다는 왠지 모를 안심이.
영원이란 것은. 멋없다. 플라스틱처럼.
늙고 희끗해지고 구부러지는 모든 것들(이들)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늙음예찬을 해보는구나. 얼쑤

… 안철수가 진보적이지 않다는 진보주의자들의 지적은 옳다. ‘분배’의 정의로움이 아니라 ‘시장’의 공정함을 요구하며 재산을 ‘기부’하는 것. 이는 철저히 보수주의의 스탠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그것은 보수의 승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엉터리 보수가 미덕과 가치를 가진 합리적 보수로 변모하는 것. 한국 사회에서 그처럼 커다란 진보가 또 있을까? 이것이 안철수 현상의 마지막 역설이다.
-진중권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842/6964842.html?ctg=1000

약품의 사용 설명서는 그와 달리 우리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경고문을 난해한 문장으로 작성한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부작용 없음, 다만 어떤 성분에 대해서는 예기치 않은 치명적인 반응이 나타날 수 있음.> 한편 가전 제품의 사용 설명서는 하나 마나 한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너무 뻔한 이야기다 싶어 건너뛰다 보면 진짜 필요한 정보를 놓치기가 십상이다.
움베르트 에코 –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내가 좋아하는 존 르 카레의 소설이 영화화
아래 비공식 포스터는 폴스미스가 디자인했다고

가을이 이렇게 흐른다.

사랑의 감정은 두 사람이 자유를 가진 것에 비례해 커지는 법이다. 사랑이 최고의 기쁨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언제인가? 언제든지 나를 떠날 자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상대방이 내 곁에 머무는 순간일 것이다. 반면 상대방이 여러 이유로 나를 떠날 수 없게 되었을 때, 놀랍게도 사랑이 수반하는 설렘과 기쁨은 급속도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떠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우리는 더는 상대방의 속내를 읽거나 그에게 기쁨을 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잊지 말자. 사랑의 열정과 기쁨은 오직 상대방이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설레는 마음으로 결혼식 날짜를 기다리는 연인들은 사랑에 대해 더 깊게 숙고해야만 한다. 축복받은 결혼식이 두 사람의 자유를 제약하고 마침내 사랑의 열정을 싸늘하게 식혀버리는 저주의 시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24>사랑과 결혼 사이 中

이혼 전문 철학자 강신주 선생

인간은 행복하려고 한다. 누가 불행을 선택하는 위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 자살을 선택한 사람도 행복하려는 사람이다. 살아있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더 이상 상황이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자살은 마지막으로 행복을 추구하려는 행동일 수 있다. 과거 반역죄로 잡힌 사람에게 재갈을 물린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앞으로 있을 잔혹한 고문, 그리고 예정되어 있는 처형, 이런 상황에서 반역자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행복할 수 있는 권리는 자살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국가로서는 반역자가 행복한 꼴을 볼 수가 없다. 그러니 자살하지 못하도록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이 순간 반역자가 바라는 행복은 자살이고, 피하려는 불행은 자살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자살을 생각하는 당신, 잠깐만!” – 강신주